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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오바마 취임식을 본 김 위원장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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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보셨지요? 서울과 평양 시간으로 어제 새벽에 있었던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취임식 말입니다. CNN이 전 세계에 생중계를 했으니 아마 CNN으로 보셨겠군요. 이례적으로 한국 지상파 TV 3사도 심야 생중계를 했으니까 남한 TV로 보셨을 수도 있겠네요. 저도 졸린 눈을 비벼가며 끝까지 봤습니다.

어떻던가요?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한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 말입니다. 그만하면 세계 최강국인 미 합중국 대통령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던가요? ‘미국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취임 연설은 또 어떻던가요? 솔직히 저는 살짝 실망했습니다. 용을 그리려다 뱀을 그린 것 같아서요. 역사의 대리석에 새길 명문(名文)을 남기겠다는 욕심 탓에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렇더라도 232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희망과 미덕을 갖고 한 번 더 한파를 뚫고 폭풍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자”고 호소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고요. 미국 민주주의의 힘이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요.

 물론 위원장께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셨을지 모르겠군요. 바둑판. 맞아요. 오바마와 대국(對局)하는 상상을 하셨을 수 있겠어요. 저 같은 범부(凡夫)의 생각과 천하대세를 논하는 위원장의 사색은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를 테니까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수 싸움 때문에 TV를 보면서도 머릿속이 편치 않았을 것 같군요.

오바마가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은 바둑판은 말이 바둑판이지 사실 난장판이나 다름없어요. 형세 판단을 잘못해 활로가 막힌 곳도 있고, 정신없는 행마(行馬) 끝에 둔 자충수로 패착(敗着)이 된 곳도 있어요. 정석을 모르는 하수가 대개 그렇듯 끊을 곳에서 잇고, 이을 곳에서 끊는 실착(失錯)을 되풀이하면서도 일수불퇴(一手不退)를 고집한 결과겠지요. 오바마로서는 한숨이 나올 만합니다.

당연히 호기라고 판단할 수 있겠어요. 선수를 치고 나간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기 사흘 전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을 군복 차림으로 조선중앙TV에 등장시켜 “(남한 정부가) 대결의 길을 선택한 이상 그것을 짓부시기 위한 전면 대결 태세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한 것 말입니다. 남한 정부에 대한 협박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오바마를 겨냥한 위원장의 선수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 며칠 전엔 관계 정상화와 핵 폐기의 선후(先後)를 놓고 수 싸움을 벌이기도 했지요. 북측 외무성 대변인이 “조·미 관계 정상화가 비핵화보다 먼저다”라고 선언하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내정자는 다음 날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관계 정상화는 북한이 핵무기 계획을 폐기하기 전까지 불가능하다”고 바로 받아쳤어요. 그러자 다시 외무성 대변인이 “미국으로부터의 핵 위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핵무기를 보유할 수밖에 없다”고 되받아쳤고요. 핵 폐기는 미국과 핵 군축 차원에서나 논의할 문제란 얘기니 이쯤 되면 초강수로 봐야겠네요. 그럼에도 오바마가 무반응인 건 당연합니다. 다른 급한 일들로 워낙 정신이 없으니까요. 사실 오바마는 지금 다면기(多面棋)를 두고 있어요. 반응이 느리더라도 이해해야 할 겁니다.

 위원장과는 거의 스무 살 차이가 나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결코 만만하게 볼 오바마가 아닙니다. 사려가 깊으면서도 유연한 것이 상당히 고단수 같아 보여요. 신중하지만 일단 결정하면 신속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요. 부드러운 사람이 작심하면 더 독한 데가 있거든요.

제 소견으로는 시기를 기다려 빅딜을 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아요. 이것저것 반상(盤上)에 다 올려놓고,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식으로 통 큰 계가(計家)를 하는 것 말입니다. 그때까지는 조용히 기다리면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최선일 것 같네요. 오바마, 그 사람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니 너무 힘들게 하지 마세요. 행운을 빕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