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 태평양 항모 지령 받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20일 오전 11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광동리 C농장 안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전원주택.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맏사위 이모(60)씨의 집이다.

11일 새벽 괴한 32명이 포클레인을 동원해 “YS 비자금을 찾는다”며 난동을 벌였던 곳이다. 인근 50~100m 주위로 빌라 10여 채가 띄엄띄엄 있지만 한적한 시골의 풍경이다. 9일이 지나 나무 울타리와 잔디밭, 나무 테라스는 난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복구됐다.

<본지 1월 20일자 2면, 일부 지역 12면>

이씨 집 인근의 한 주민은 “보름 전쯤 YS 사위 집이 증축공사를 마쳤고 지하 보일러실이 보통 집에 비해 상당히 커 인부들 사이에 ‘비자금을 숨긴 것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고 전했다.

YS의 한 측근은 “이씨가 새 집으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이민 보따리에 싸인 책더미를 돈뭉치로 오인, 비자금이란 소문이 돌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 집 사건을 수사 중인 광주경찰서는 구속된 육군 준위 출신의 김모(54)씨와 전모(34)씨 등 주동자 4명을 상대로 아르바이트생 28명을 고용해 범행에 이르게 된 동기를 집중 조사했다.

하지만 주동자 4명은 경찰에서 “비자금 회수 임무를 맡은 유엔 178개국 국제금융수사단이다. 태평양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항공모함의 지령을 받고 있다” 등의 엉뚱한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한다.

‘유엔 국제금융수사단’은 경찰이 미국 뉴욕 주재관을 통해 확인한 결과 유령단체로 드러났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정치권 배후설’도 부인하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주동자들은 7∼8년 전 다단계사업을 하며 서로 알게 됐다. 전씨는 과거 시흥에 있는 ‘I 보디가드’라는 용역업체 직원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아르바이트생과 포클레인 기사 등 28명을 일당 20만∼40만원에 고용했다. 포클레인 1대, 트럭 2대, 스타렉스 3대를 앞세우고 이씨 집으로 이동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이명균 강력계장은 “주동자 4명은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정치권과 무관한 인물인 데다 모두 사기 또는 폭력전과 4∼16범이어서 단순 떼강도 사건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전씨 등은 11일 0시30분쯤 YS 사위 이씨 집에 침입, “지하에 비자금을 보관하는 벙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폭행한 뒤 이씨에게 30만원을 빼앗았다가 경보시스템이 작동해 경찰에 붙잡혔다.

한편 YS는 “오늘(20일) 아침 보도를 보고 (사건을) 알게 됐다”며 “어떻게 18세기에나 있을 법한 일이 법치국가에서 벌어질 수 있느냐”고 말했다고 그의 측근은 전했다.

수원=정영진 기자, 광주=김경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