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부도방지협약 유지해야 - 긍정적 취지 살려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부도방지협약이 부실징후 기업에 대한 무차별적 여신회수등 각종 역기능을 드러내면서 존폐논란을 빚고 있다.인위적인 조치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이 문제는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폐지론이고,대기업 부도는 파장이 엄청난만큼 안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존치론이다. 편집자

지난 4월18일 확정된 부도방지협약은 시행되자마자 엄청난 비난과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기업부도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관치(官治)금융적

발상이며,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이 이 협약을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또

대상기업의 조건이 여신잔액 2천5백억원 이상이므로 결국 재벌기업에만

혜택을 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이름은 부도방지협약이지만 부도를 안 내는 것은 아니다.적용대상

기업의 어음이 교환회부될 경우 일단 부도처리는 한다.다만 당좌거래

정지,불량거래처 등록등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고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하도록 혜택을 주는 것이다.

적용대상 기업은 일정기간 채권상환 부담이 유예되므로 다시 살아날 기회를

갖게 된다.이렇게 지원해 주어도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채권기관협의회가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청산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이와같이 협약의 취지는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다.다만 담보도 없이

신용대출을 해준 제2금융권의 경우 채무동결이 되면 타격을 받으므로 약간

이상한 낌새만 있어도 채권을 회수해가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이때문에

소문이 기업을 죽인다는 비판이 있다.이런 점을 악용해 지금 금융권에는

경쟁자를 음해하는 루머가 판을 치고 있다.금융대란설등도 따지고 보면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장 부도방지협약을 폐지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는가.불황의

여파로 올해는 30대 재벌중 25개 이상이 적자를 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단순히 적자를 내는데 그친다면 괜찮으나 실제 부도를 내고 넘어진다면

정치.경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게 뻔하다.한보사태에서 보듯 대출

비리,정치적 외압등 시비가 일게 마련이다.그 결과 불황이 공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일부에서는 불황이든 공황이든 기업활동에 관해선 시장경제원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대기업이 쓰러져 은행.주주.거래업체등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 뻔히 예상되는데도 이를 외면하고'부도는 시장경제원리'라며 방치한다면 도대체 그런 시장원리를 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이 간다.

그것은 시장원리가 아니라 정글의 법칙에 가깝다.시장원리란 적절히 보정(補正)될 때 가장 효율적인 법이다.

경제는 심리적 요인에 의해서도 많이 좌우되는 것이다.기업인이나 소비자들이 우리 경제에 무언가 안전판이 작동되고 있다고 믿는게 경제안정을 위해 중요하다.문제는 있지만 더이상 대형 부도가 나 사회를 불안케 하는 일은 없겠구나 하는 믿음만 준다해도 이 협약은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협약이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몇가지 보완대책은 필요할 것 같다.무엇보다 정상화 대상 기업을 선정하는 기준이 명확해야 협약을 악용하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또 금융기관간 부담의 형평(衡平)도 고려해야 한다.제2금융권에서는 종금사에만 부담을 지울게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 대출을 해준 여신전문기관도 포함시키는게 바람직하다.

장기적으로는 이런 협약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일본과 같이 부실채권 인수기관을 제대로 설립하든지,미국과 같이 자산담보부 채권이 유통될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야 형평성 시비도 사라지고 금융기관의 부담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유한수 포스코경영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