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③ 김연수→김원우 『모서리에서의 인생 독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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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씨는 원고를 예정된 마감보다 하루 지나 보내왔다. 『모서리에서의 인생 독법』이 “워낙 좋은 책이라 추천 글도 며칠을 두고 짬짬이 써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썼어요. 많은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고 알려주고 싶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니까요.” [중앙포토]

 선생의 신간 소설을 읽는 일은 내 은밀한 즐거움 중의 하나다. 은밀하다는 말에 불순한 속셈 같은 건 하나도 없다. 다만 많은 사람이 선생의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이 즐거움이 은밀해졌다는 소리다.

나는 매번 소설을 쓸 때마다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게 “이젠 이력이 붙을 때도 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그럴 리가. 그 사람은 김원우 선생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게 틀림없다. 지난해에 선생이 출간한 장편소설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을 읽어보면, 허투루 쓴 문장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말이 유장하게 계속 이어지는데도 어디 하나 비틀어지거나 꼬이지 않는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둘째치고라도 그 문장 하나하나를 중얼중얼 읽는 것만으로도 눈과 입이 호사를 누린다. 어느 쪽을 펼쳐 봐도 원경과 근경의 초점이 모두 정확하게 맞은, 신기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사진을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대개 산문 정신은 이런 문장 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이라 짐작한다. 이 소설에는 신의주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한 의사의 삶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구체적인 세계를 다루는 산문이 어떤 식으로든 그 세계를 초월할 때는 바로 이런 경우를 당할 때가 아닌가 싶다.

여기에 대처하는 일반의 태도는 선생이 여러 작품에서 언급했듯이 두루뭉술한 태도이리라.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접근하는 건 선생이 여러 작품에서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거니와, 소설에서는 산문 정신에 가닿기는커녕 하나마나한 중언부언에 그칠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독자로서 나는 선생의 작품을 즐겁게 읽지만, 작가로서는 따라 읽는 게 힘에 부친다. 자칭 작가라고 말했지만, 속내를 털어놓자면 선생 앞에서는 면구스럽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안면몰수하고 나는 선생의 작품은 물론 그 인품도 존경한다. 등단할 때부터 선생에게 여러 번 면박을 당했지만, 그럴 때조차도 나는 즐거웠다. 그렇게 소설가란 작품을 쓸 때마다 다시 소설가가 되는 자라는 사실을 배웠으니까. 그런 판국에 거기 어디에 이력이 붙을 여유가 있을까.

2009년에 다시 읽는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은 또 새롭다. 이 소설에는 ‘먼차우전 증후군’이 나온다. 병든 것처럼 처신해서 얼렁뚱땅 의무를 방기하는 태도다. 환자가 아닌데도 앓는 소리를 내는 데는 저마다 남모를 속사정이 있는 법.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문장에 넋을 놓고 읽고 나면 이 집단적인 무병신음, 즉 병 없이 내는 앓는 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서리에서의 인생 독법』(강, 2008년)=김원우(62)씨의 장편 소설. 명망 높은 한 의대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 명망과 달리 “자신의 살아온 경력 일체를 오자낙서(誤字落書) 지우듯이 새카맣게 먹칠을 해버린 어떤 의사의 흔적”을 두고 후학들이 가까스로 “삼팔따라지 월남민 의사”의 생애를 복원하는 이야기를 뼈대로 한다. 김연수씨가 “읽는 것만으로도 눈과 입이 호사”라 표현한 문장은 이렇다. “한쪽은 맷돌처럼 과묵하고 부지런했으며, 다른 한쪽은 참외처럼 아금받고 오사바사해서 집에서 큰소리가 날 일도 없었다.”



◆김연수=상 복 많은 작가다. 올해 초 받은 이상문학상부터 황순원문학상(2007년)·대산문학상(2005년)·동인문학상(2003년)까지 석권하는 등 “인세보단 상금으로” 먹고산다. 1993년 ‘작가세계’에 시로 먼저 등단한 뒤 9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소설가의 길에 들어섰다. 장편 『꾿빠이, 이상』『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산문집 『여행할 권리』 등이 있다. 1970년생, 경북 김천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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