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92>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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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16면

될 수 있으면 8월 첫째 주말에 일본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일본 고교야구 전국 선수권대회, 이른바 고시엔(甲子園)을 보고 싶어서다. 그 뜨거운 여름, 내리쬐는 태양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그 안에 있다. 오사카 고시엔 구장에서 직접 그 열기를 느끼는 건 짜릿할 테다. 그렇게까지 못한다면 고교야구에 쏟아지는 그들의 열정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다. 신문과 방송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연을 나누는 것. 그래서 그 고교야구가 주는 의미와 가치가 단순히 ‘일본 고교야구 챔피언을 가리는 것’ 이상임을 아는 것. 그것도 유익할 것 같다.

일본 야구의 명품, 고시엔을 향한 질투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고시엔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선수들은 야구를 한다. 그들의 등번호는 1번부터 9번까지. 그 등번호 위에 선수 이름은 ‘당연히’ 없다. 고시엔의 전통이자 규율이다. 그들에겐 오로지 향토의 명예를 건 학교의 이름만이 가슴에 새겨져 있다. 관중석에는 양쪽 학교의 응원단과 재학생·동문이 빼곡히 들어찬다. 그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진지한 응원을 한다. 승부가 기울어도 그 시간이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인 듯 진지함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경기가 끝나면 이긴 학교의 교가가 나온다. 학생(!)들은 일렬로 늘어서 스코어보드 옆쪽의 학교 깃발을 향해 부동자세를 취한다. 교가를 따라 부르는 그들의 눈빛은 누구보다 자랑스럽다. 학교의 명예를 빛내서, 고장의 자랑스러운 일원이 돼서 어깨는 누구보다 당당하다. 교가가 끝나면 그들은 응원단 앞으로 뛰어가 인사한다.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돌아온다.

그 시간에 진 팀은 장비를 챙기고 퇴장 준비를 서두른다. 응원단으로 달려가 인사를 하고, 박수를 돌려받는 건 같지만 그들에게 교가 세리머니는 없다. 대신 그들은 눈물을 살짝 보이며 고시엔 그라운드의 흙을 담는다. 일전에 한번은 그들이 흙을 담는 주머니에 ‘청춘(靑春)’이라는 선명한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아!” 하고 얕은 탄성을 지른 적이 있다. 우보(牛步) 민태원이 ‘청춘예찬’에서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의 새가 운다’고 표현했던 그 소중한 시절, 청춘의 한편에 고시엔의 추억을 간직한다는 건 얼마나 큰 의미인가.

고시엔을 ‘야구경기 이상의 그 무엇’으로 만들어 주는 힘은 뭔가. 그 안에 꿈과 전통이라는 스포츠 최고의 가치가 담겨 있어서다. 서울대 강준호 교수는 스포츠가 줄 수 있는 가치의 4단계를 재미/즐거움→감동→정체성→꿈/전통의 순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고시엔에는 그 4단계의 모두가 있다. 스포츠가 줄 수 있는 가치의 모든 게 담겨 있기에 고시엔은 스포츠의 ‘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야구의 봄은 프로보다 고교야구에 먼저 온다. 곧 3월이면 전국대회가 있고 2월 중에는 그 대회를 위한 각 지역 예선이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 고교야구엔 언제부턴가 감동도 정체성도, 꿈이나 전통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오로지 약간의 재미만이 남아 있다. 지금의 구조로는 개선의 여지조차 없다. 우리 고교 선수들이 가엾다. 그 청춘에게 꿈과 전통을 찾아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로 옆, 일본의 고시엔이 질투가 나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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