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책에 길을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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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대한민국은 정말 수수께끼 나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놀라운 경제적 성공을 거둔 거의 유일한 이 땅에서 자부심은커녕 자학과 증오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온다. 서울대 전상인 교수의 지적대로 춥고 배고팠던 60~70년대 ‘헝그리(hungry) 사회’는 요즘 걸핏하면 골내는 ‘앵그리(angry) 사회’로 바뀌었다. 정부·공권력·기성세대 등 제도권 전반에 대한 ‘묻지마 증오’와 불신은 상상 그 이상이다.

미네르바 구속 뒤 네티즌 반응이 그러했고, 그 이전에 촛불이 그랬다. 분노·증오란 사회 체질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20여 일 전 이 칼럼의 의견대로 디지털세대가 중심이 된 촛불 시위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초토화할 기세의 ‘전자사막’이었다. 식탁안전·광우병이란 빌미였을 뿐 새 정부를 흔드는 정치운동으로 치달았는데, 그럼 이 증오의 뿌리는 무엇일까?

체제비판과 사회정의를 앞세웠던 좌파 문화(민중문화세력)가 거둬온 지난 30년의 승리가 결정적이다. 크게 보자면 이들이 심어준 감수성과 가치관이 미네르바와 네티즌 세대에 깊게 스며든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다. 상식이지만 1970년대 민중문화운동은 문학·미술·영화에서 학술에 이르는 전 장르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불패의 권위를 가진 이들의 헤게모니는 좌파정권 10년을 창출해온 핵심 동력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출발은 소박했다. 70년대 산업화의 그늘을 보듬자는 것이었다. 문학의 경우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세희의 ‘난쏘공’과 황석영의 ‘객지’등 도시빈민·노동자를 그린 일련의 작품이 그때 등장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현대사 해석으로 전선을 확대했고, 암묵적으로 정치투쟁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현기영의 ‘순이 삼촌’,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경우 4·3사건 등에 대한 비판적 해석의 표준을 제시했고, 지금은 고전으로 추앙받는다.

해방 이후 보수 문단을 완전 물갈이한 문학은 이웃동네(영화·미술)에 영향을 줬다. 영화의 경우 6월 대항쟁 시절 ‘구로 아리랑’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앞세워 검열철폐 운동을 시작했으며, 오윤·박불똥·홍성담·신학철 등의 민중미술도 탄력 받았다. 학계도 이때 합류했다. 강만길의 『한국현대사』나 『해방 전후사의 인식』시리즈 배출, 친일파 인명사전을 만드는 민족문제연구소 설립도 이때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민중문화운동이 그때 완결된 사이클을 갖췄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문화 흐름의 하나가 아니라 권위있고 가치중립적인 지식·정보로 변신했고, 학문의 옷을 걸치기 시작한 것이다. 시인 김수영의 유명한 말대로 문화는 본디 ‘불온한 것’이고, 삐딱한 반성과 비판적 상상력이 기본이다. 문제는 그게 도를 넘어 ‘문화 공룡’으로 진화한 점이다. 왜 공룡인가?

그들의 지적·문화적 헤게모니는 좌파 정권 10년에 이미 권력화·체제화했다. 온갖 과거사 정리 소동, 현대사 교과서에서 보여주듯 민중문화를 유일한 진실로 굳히는 대못질 작업도 진행해 왔다. 대못 제거는 곧 사회적 저항을 만나도록 장치를 했는데 그게 촛불이었다. 민중문화의 콘텐트를 흡수해온 젊은 세대가 철 지난 신념을 품은 채 ‘대못 수호’에 나선 모양새였다.

상식이지만 문화란 살아있는 생태계다. 지분 싹쓸이 내지 장기 집권이란 문화 생태계의 종(種) 다양성을 해칠 뿐이다. 또 문화는 정신의 독립공화국일 수는 있어도, 체제 수호의 해방구일 수는 없는데도 작금의 상황은 우리 기대와 다르다. 지난 1년의 경험에서 보듯 좌파의 아집과 분노는 여전하다. 즉 새 패러다임 도입을 수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자세다. 반면 뉴 라이트를 포함한 반대 진영은 무기력하다.

반복하지만 민중문화 헤게모니 30년 문제는 문화사의 큰 흐름이다. 우리 문화의 자랑스러운 활력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느 것에 못지않은 성찰의 대상이다. 요즘은 여하한의 정치·사회개혁도 문화영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촛불, 그리고 지독한 사회적 증오와 분노…. 우리는 지금 간단치 않은 문화전쟁의 진통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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