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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부즈맨칼럼>밀도 있는 茶기사 취재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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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월의 문화인물로'초의(草衣)선사'가 선정된 바 있고,'차의 날'(25일)을 계기삼아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를 선양하는 여러가지 행사가 펼쳐진 바 있다.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런 행사들이 중앙일보에는 충실히 보도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차문화 현상을 생각할 때 나는 중앙일보가 보다 밀도있게 차(茶)에 관한 기사를 취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우리나라의 차인구(茶人口)는 최근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것은 94년에 3백억원 규모의 녹차시장이 96년 5백억원을 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차인구가 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차에 관한 여러가지 정보 수요가 늘고 있음을 말해 주는 셈인데,그것을 신문이 소홀히 할 까닭은 조금도 없을줄 안다.

茶동호인 폭증 유념해야 나는 차를 단순히 마시는 기호상품으로만 보지 않는다.그것은'다도'(茶道)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역사성(歷史性)과 정신적(精神的) 경지를 함유하고 있는 상품이기 때문이다.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음다흥음주망'(飮茶興飮酒亡)이라고 했다.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는 뜻이다.이 말은 어떤 의미에선 인간사(人間事)의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은 아호(雅號)에 다(茶)자를 붙일 정도로 다도에 일가(一家)를

이뤘는데'동다기(東茶記)'라는 저서까지 썼다.다산과 함께 근세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中興)시킨 삼절(三絶)로는 흔히 초의선사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손꼽힌다.특히 초의선사는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이라

불리고 있으며 그가 남긴'다신전(茶神傳)'과'동다송(東茶頌)'은 우리나라

다도의 전통과 맥을 회생시킨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

초의는'동다송'에서 중국차(中國茶)와 비교해 우리나라의 차,즉

동다(東茶)야말로 차중의 차(茶中之茶)라고 예찬한 바 있다.

초의가'다성'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목(李穆)은 우리나라의

다부(茶父)라고 불린다.이목은 우리나라 차의 육덕(六德)과 오공(五功),그리고

차 마시기의 일곱가지 효능을 노래한'다부(茶賦)'를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차의 여섯가지 덕목은 ①오래살게 하고 ②병을 고치게 하고 ③기운을 맑게

하고 ④마음을 편케 하고 ⑤신령스럽게 하고 ⑥예절을 갖추게 한다는

것이고,차의 다섯가지 공력은 ①갈증을 풀어주고 ②가슴의 울적함을

풀어주고 ③주객(主客)의 정(情)을 화락하게 하고 ④소화가 잘 되게 하고

⑤술을 깨게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목은 차의 일곱가지 효능을 읊어

①한잔을 마시니 마른 창자가 깨끗이 씻기고 ②두잔을 마시니 마음과 혼이

상쾌하고 ③세잔을 마시니 호연지기가 생겨나고 ④넉잔을 마시니 가슴에

웅호한 기운이 생기며 울분이 없어지고 ⑤다섯잔을 마시니 색마가 도망가고

탐욕이 사라지며 ⑥여섯잔을 마시니 신기함이 하늘나라에 오르는듯 하고

⑦일곱잔을 마시다가 반이 채 안되는데 맑은 바람이 울울히 옷깃에

일어난다고 했다.

한국茶道 정립에 기여를 이목의'다부'는 중국의'다선십덕(茶扇十德)'과

대비되기도 하는데 나는'다부'가 훨씬 풍류스럽고 분석적이며 동시에

현묘(玄妙)한 경지의 것이라고 보고 있다.우리나라의 차문화와 관련해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분명 다도가 있거늘 그것이 올바로

정립되지 못하고 점점 국적불명(國籍不明)의 것이 돼가는 느낌이 짙다는

점이다.이 점은 신문이나 방송이 분명히 가려서 계도해야 할 터인데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이른바 일본다도(日本茶道)가 마치 우리것인양 둔갑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마저 버젓이 벌어지고 있고,그것이 보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와 관련해서도 삼국사기(三國史記)등에 엄연한 기록이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곡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그런 잘못은 진작

바로잡혔어야 할 터인데도 어찌된 일인지'바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관계당국의 태도도 그렇거니와 매스컴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내가 이렇게 지적한 까닭의 한가닥은

경남 하동의 쌍계사(雙磎寺)계곡에 세워진'김대렴(金大廉)추원비'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흥덕왕(興德王)3년(828년) 당나라에 갔던 사신

대렴(大廉)이 차씨(茶種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돼 있다.이것은

정사(正史)에 나타난 차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동시에 차의

시원(始源)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그런데'대렴'의 성은 대(大)이고 이름은

렴(廉)인데도 이것을'김대렴'으로 둔갑시켜 차의 시원을 기리는 추원비까지

세웠고,그것이 방치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기도 하다.

'대'씨는 발해의 대조영(大祚榮)등에서 알 수 있듯 엄연한 우리 고유의

성씨다.그러나 일제(日帝)는 차의 역사에서도 우리것을 훼손하고 그들의

우위를 내세우려 획책했다.그것이 식민사학자에 의해 그대로 수용된 것이

오늘의 차문화 몰골이다.그런 내력의 엉터리 추원비 앞에서 차의 날을

기념했다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규행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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