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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시대 성철의 가르침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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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불교가 우리 시대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올 여름 한철 각계 지도층 인사가 고우 스님과 함께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을 읽으며 그 뜻을 찾아나선다.

우리 시대 불교는 개인과 사회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지난 3일 밤 서울 조계사 극락전은 '경전에 묶인 불교'가 아닌 '생활과 함께하는 불교'를 찾으려는 열기로 가득했다.

극락전에는 200여명의 재가불가가 함께했다. 대학총장.고위공무원.최고경영인 등 지도층 인사가 두루 모였다. 이들은 올 여름 석 달 동안 11년 전 입적한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장경각)을 공부하며 한국 불교의 쇄신, 나아가 한국 사회의 변혁을 향한 지혜를 모을 예정이다. 지도법사로는 경북 봉화군 각화사의 고우(68)스님을 모셨다. 한국 선불교의 '차세대 리더'로 꼽히는 고우 스님은 지도층의 전면적 의식전환을 요구했다.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메시지는 칼날처럼 예리했다.

"요즘 중도(中道)와 상생이 정치권의 인기어로 떠올라 반갑습니다. 매사를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이겠죠. 보수와 진보, 성장과 분배 논란도 중도로 풀어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 같은 이념 갈등은 무엇보다 수단이란 점을 명심해야 해요. 목적은 국민 민복이죠. 백성을 잘 살게 한다는 데 합의 못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중도를 알면 진보든 보수든 싸울 일이 없어요."

중도는 '나와 너''있다와 없다''남과 여' 등 극단적 입장을 버려야 한다는 불교 용어다. 성철 스님이 '백일법문'에서 숱한 경전과 조사(祖師) 어록을 살피며 제시한 불교의 요체도 중도로 수렴된다. 고우 스님은 이날 정치.경제.교육.종교 등 우리 사회의 제반 문제를 질타했다.

"교육을 볼까요. 인간(목적)은 사라지고 성적(수단)만 남았습니다. 종교는 어떻습니까. 달(진리)과 손가락(방편)을 혼동하는 수행자가 많아요. 이념은 수단인데 이를 목표로 착각하는 정치인은 어떤가요. 공산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란 목적을 잊어선 안 돼요. 중도를 알면 남북통일도 어렵지 않아요."

스님은 중도란 이념이 아닌 생활이라고 못박았다. 중도를 알면 매일이 좋은 일이요, 매사가 좋은 일이라는 것. 세상에 홀로 떨어져 존재하는 물체(예컨대 집은 여러 건축 자재가 모인 것에 불과하며, 물질의 최소 단위인 쿼크도 여러 요소로 구성됐다)가 절대 없듯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연기(緣起)를 깨달으면, 즉 우리 모두가 위대한 존재임을 확인하면 "늙고 죽는 것마저 축복이 된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9월 12일까지 2주 단위로 '백일법문'을 토론하며 '하안거 재가논강'을 진행할 계획이다. "각계 지도자가 자기 분야에서 중도를 시험해달라" "내가 당한 만큼 남에게 되갚지 마라"는 스님의 당부가 메아리쳤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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