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매질에 남편 살해 - 여성단체서 기구한 아내 구명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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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 18년은 정말 끔찍한 세월이었습니다.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살아온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21일 오전 서울 관악경찰서 형사계.매질을 일삼는 남편을 살해한 주부 윤선화(尹善花.37.서울관악구신림동)씨가 멍한 눈초리로 넋이 나간듯 앉아 있었다.

尹씨가 친지의 소개로 남편 최동부(崔東富.41.노동)씨와 결혼한 것은 19세때인 79년. 신혼 한달이 지나면서 남편 崔씨는 술만 먹고 들어오면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목을 조르고 주먹을 휘둘렀다.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체격이 건장한 남편은 제풀에 지쳐 잠이 들 때까지 尹씨를 닥치는대로 두들겨 팼다.

칼과 연탄집게를 들고“돈을 벌어오라”며 위협하기 일쑤였고 깨진 유리병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는등 가재도구는 모두 흉기로 돌변했다.매맞는 날이 잦아지면서 尹씨는 말이 많아지고,자신을 위협하는데 쓰이던 유리컵.식칼등 가재도구를 집밖에 내다버리는등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15일 만취상태의 남편이 뺨을 때리는등 주먹을 마구 휘두르자 尹씨는 다음날 가게에서 흉기를 구입,싱크대 서랍에 넣어뒀다.

20일 밤 역시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이 신을 신은채 또다시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둘렀다.평소대로 남편은 그러다 잠이 들었고 尹씨는 21일 오전1시쯤 남편의 가슴을 흉기로 찔렀다.그리고는 경찰에 신고하기 앞서 남편이 쓰러진 방안에 소금을 뿌리고는 남편이 자살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尹씨는 경찰에서“남편이 생활비조차 내놓지 않으면서 돈을 벌어오라며 때릴 때마다 죽이고 싶었다.범행후 소금을 뿌린 것은 더이상 이같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말했다. 매맞는 아내가 줄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전체 주부의 40%쯤이 매를 맞고 있으며 전체의 10%는 심각할 정도로 구타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의전화는 95년 총 상담 1만5천3백90건중 21.1%(3천2백54건)를 차지했던 남편의 구타에 관한 상담이 96년에도 24.5%(총2만3천7백53건중 5천8백8건)로 여전히 1위였다고 밝혔다.

지난해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전국 25개 지역 3백32명의 여성 상담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물건이나 흉기로 직접 폭행당한적 있다'는 대답이 34%(1백13명)였다.

이에따라 여성의전화등 여성단체들은 21일 낮12시 서울 여의도 신한국당사 앞에서'매맞아 죽은 여성들을 위한 위령제'를 갖고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촉구했다.또 여성의전화는 여성단체들과 함께 남편의 상습 구타를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윤선화씨 구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정제원.김정수.심재우 기자

<사진설명>

21일 오후 서울여의도 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매맞아 죽은 여성들을 위한 위령제'에서 여성단체 회원들이 자료사진등을 들고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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