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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시인 정호승. 최승호씨 글쓰기 어려움 작품을 토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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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우리 문학의 허리라 할 수 있는 중견문인들의'문학하기'가 몹시 괴롭다.원로나 중진들은 확고한 일가를 이루었거나 혹은 관성으로 그런대로 버틸 수 있고 신진들은 특유의 패기로 이 세계 저 세계를 기웃거리며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중견들은 이제 자기만의 세계를 다져야 한다는 중압감이 따른다.특히 인간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정하게 급변하는 세기말적 상황이 이제껏 쌓아온 문학세계의 기반마저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어 이 시대 중견들의 글쓰기는 이중으로 괴롭다.

이런 중견들의 문학하기의 괴로움을 작품 자체로 보여주는 두권의 작품집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정호승 시인은“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며 7년만에 다섯번째 시집'사랑하다 죽어버려라'(창작과비평사刊)를 펴냈다.또 최승호 시인은“가상현실인지 현실가상인지 현란한 환영(幻影)의 시대,교묘한 헛것보다 질박한 짐승의 더운 피가 그립다”며 시집이 아닌 우화집'황금털 사자'(해냄刊)를 선보였다.

각각 73,77년 문단에 나온 정.최 두 시인은 이웃에 대한 따뜻한 사랑,건강한 자연관과 인본주의에 바탕한 문명비판의 시로 주목받으며 유수의 문학상들을 거머쥔 우리 시단의 대표적 중견. 그러나 이 두 시인의 새 작품집은 이제 사랑하고 비판할 인간과 사회에 너무 절망한 나머지 아예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너희는 바람이 불 때마다/언제나 괴로워하지 않았느냐./사랑과 믿음의 어둠은 깊어가서/바람에 풀잎들이 짓밟히지 않았느냐./아직도 가난할 자유밖에 없는/아직도 사랑할 자유밖에 없는/너희는 날마다 해 뜨는 곳에/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 정씨의 두번째 시집'서울의 예수'에 실린 시'서울 복음2'한부분이다.정씨는 인간 본연의 가난하고 억눌린 마음 속에'그리움과 기다림'의'시'를 심어왔다.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정씨는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랑의 시를 뿌릴 터전을 잃어버린 듯하다.아니 세상이 그 터를 철저하게 앗아가 버렸다.

“내 그대가 그리워 허공에 못질을 한다/못이 들어가지 않는다/내 그대가 그리워 물 위에 못질을 한다/못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번 시집에 실린'못'전문이다.인간이어도 좋고 우리 사람살이여도 좋을'그대'가 그립지만 이제 그 그리움을 담을 대상이 없다.그래 허공이나 물에 담지만 어디 그리움이 그런 곳에 담기겠는가. 짧은 우화 94편이 실린 최씨의 우화집'황금털 사자'에도'물 위에 쓰는 우화'가 들어 있다.원고지에 작품을 써 책으로 펴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고 강가에 나가 흐르는 물 위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던 우화작가에 대한 이야기다.물고기를 웃고 울릴 수 있는 글에도 감동못하는 요즘 인간에 대한 시인의 배신감이 짙게 드리워있다.

“그 거울은 무심(無心)하지 못하였다.날마다 더러워지는 세상을 자신으로 여긴 거울은 혐오감을 참지 못하고 분노의 힘으로 온몸을 산산조각 내버렸다.일종의 자살이었다.그러자 조각조각마다 보기 싫은 세상의 파편들이 또다시 비쳐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짧게 끝나는 우화'거울의 분노'에도 세상을 향한 시인의 지긋지긋한 분노는 고스란히 들어 있다.죽어도 씻을 수 없는 세상의 더러움.그 인간 세상을 떠나 최씨는 시를 접어두고 동.식물,자연 본디의 세계로 들어갔다.

시대적 경향이나 유파를 타지 않고 시의 혼으로 인간과 사회를 지켜내던 두 중견시인을 비정한 세기말의 세태는'희망 없는 시',혹은 우화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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