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김영삼.김대중 맞대결 대역전 - 이변의 연속 野 역대 전당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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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과거 야당의 전당대회는 파란과 이변의 연속이었다.정치거목(巨木)을 키워내는 무대였기도 했다.

조병옥(趙炳玉)씨와 장면(張勉)씨가 맞붙은 59년의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대회.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격렬한 대립을 보이던 두 진영은 대회를 통해'반(反)이승만(李承晩)'전열을 가다듬는다.

결과는 趙 4백84,張 4백81표.3표차의 승리였다.

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는 가장 극적인 사례로 꼽힌다.'40대 기수론'의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이철승(李哲承) 3인의 격돌. 李씨가 대회시작 직후“김영삼을 지지해달라”며 자진사퇴,金씨의 승리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일부 석간은 마감시간에 쫓겨'김영삼 후보지명'으로 1면 톱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1차투표에서 그는 대의원 8백85명의 절반에 모자란 4백21표(김대중 3백82표,무효 82표)를 얻는데 그쳤다.

2차투표에선 李씨 지지표가 대거 김대중씨 쪽으로 몰려 김대중 4백58표,김영삼 4백10표,무효 16표의 대역전극이 연출됐다.

정회도중 김대중씨가 李씨를 다음 전당대회에서 당수로 민다는 즉석 서약문을 자신의 명함뒤에 써 전했다는'명함각서'얘기는 유명한 일화다.이는 곡절끝에 지켜지지 못했다.

당시 김영삼씨는 당선을 확신,전당대회 전날밤 수락연설문을 가다듬고 리허설까지 했다.

대회당일 남산 외교구락부에 4백~5백명분의 스테이크로 저녁식사를 예약했지만 분루를 삼켰다.

76년 대표최고위원 선거도 상황은 비슷했다.

김영삼씨는 1차투표에서 3백49표를 얻어 이철승 2백63표,정일형(鄭一亨)1백34표를 누르고 최다득표했지만 2차투표에서 鄭씨가 李씨를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또다시 쓰라린 역전패를 당했다.

김영삼씨는 79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수가 된다.이철승.신도환(辛道煥).이기택(李基澤)씨와의 4파전에서 1차투표결과 25표차로 이철승씨에 뒤졌으나 정회도중'이기택 붙잡기'로 11표차의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김대중씨의 정계은퇴 발표로 이기택씨와 김상현(金相賢)씨가 맞붙은 93년 3월 민주당 전당대회는 李씨가'김심(金心)'을 업었음에도 고전하다 2차투표에서 3백47표차로 간신히 승리했다. 김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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