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라이스 실장 연설문 파문] 정부 관계자들 깜짝 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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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첼 라이스 미 국무부 정책실장이 지난달 14일 미 아시아재단에서 한 10쪽짜리 연설문을 본 정부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미국의 중장기 대외정책을 입안하는 인사가 대아시아 정책 구상을 밝혔는데 한국 관련 부분을 가뭄에 콩 나듯 적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더 했다.

라이스 실장은 미국의 동.남아시아 관계의 핵심적 양자관계 국가를 일본.중국.인도.파키스탄 네 나라만으로 국한했다. 냉전 때는 중추적(Pivotal) 관계였고,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때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동맹관계'로 발표된 한.미 관계는 앞으로 미국의 대 아시아 핵심 관계에서 비켜난다는 의미다. 한.미 관계는 그저 미국의 일반적 동맹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묘사됐다.

라이스 실장의 연설문이 아시아에서의 새 흐름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이익을 다뤘다는 점은 더욱 주목을 끈다. 미국의 구상이 한국은 그냥 지나쳐 버린다는 '한국 통과(Korea passing)'일 가능성 때문이다. 연설문이 동북아 3국 가운데 일.중과의 관계를 강조한 것은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특히 일본 예찬론은 연설문 곳곳에 깔려 있다. 일본은 세계적 전략 차원의 파트너라는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 강조는 부시 행정부 출범 초 중국을 전략적 경쟁국으로 자리매김한 정책이 대테러전 공조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아시아 정책의 축을 과거의 동맹에서 강대국 중심으로 가져가겠다는 입장도 깔려 있을 수 있다. 미국의 이런 관계 설정 속에서 한.미관계의 외교 전략적 중요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미국은 파트너십을 확대하고, 또 국제적 현안이 생길 때마다 유지(有志)연합을 결성해 왔다.

라이스 실장의 연설문은 한국 때리기(bashing)의 인상도 풍긴다. 대 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 지원과 관련해 한국의 지원.파병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몇 손가락에 꼽힌다. 그런데도 그는 일본과 중국 등의 지원 사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한국의 공헌에 대해선 "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문제에서 일본.필리핀.몽골.호주.뉴질랜드.싱가포르.태국과 공동 대처했다"고만 했다. 그는 일본에 대해선 감사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썼다.

라이스 실장의 이번 연설은 향후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계획(GPR)과 맞물려 있을 수도 있다. 대외정책 구상과 군사전략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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