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짚기>'아줌마' 말고 다른 호칭 없나요?-신세대 주부 갈등의 빛과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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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아줌마,여기 잔돈!” 스물아홉 생일이 낼 모레인 주부 김모씨는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부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해졌다.'아줌마'라니.이래봬도 결혼하고 한동안은 청바지 입고 나가면 학생 아니냐는 소리도 듣곤 했는데.아무래도 이사하고,집수리 하면서 부쩍 삭은 모양이다.요즘들어'아줌마'소리가 잦다.

결혼한지 3년째,돌배기 아기엄마인 김씨가 아줌마이길 거부하는 심경을 같은 또래 여자라면 다 이해한다.아랫배가 좀 나오긴 했지만 출산후 거의 결혼전 체중으로 돌아온 몸매로 보나,옷입는 걸로 보나,어떻게'푸짐한 몸뻬바지에 파마머리'로 패션을 통일한 어머니세대와 같이'아줌마'로 불릴 수 있냔 말이다.

그렇다고 거품꺼진'미시(missy)'에 연연해하는 것은 아니다.'미시'든,'신(新)현모양처'든,'프로주부'든 다 너무 잘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게다가 그렇게라도 대우해주는 경우는 주로 물건파는 사람들이란걸 알기 때문이다.한낮에 찾아오는 외판사원들은'주부님''어머님''사모님'하면서 비행기를 태우지만 자동차 몰다가 조금만 머뭇거려봐라.백미러를 통해“그러면 그렇지,아줌마는 할 수 없어”하는,들리지 않는 소리가 읽힌다.

뭐,그게 딱이 주부만의 설움은 아니다.대학시절 은사님도 교문 밖만 나서면 그냥'아줌마'로 통한다고 하시지 않던가.한국사회에서'아줌마'는 비하어(卑下語)야,그렇게 생각하며 상가모퉁이를 도는데 누가 부른다.

“아가씨,참외 좀 들여가요.맛이 참 좋아.” 결혼전에는'아가씨'소리도 징그럽게 듣기 싫었는데 그나마'아줌마'보다는 한결 반갑게 듣는 마음이 스스로도 간사하게 여겨져 서글프다.직장에서 남자동료가“미스 서”하고 부르길래“왜? 미스터 박?”하고 받아쳤다는 선배 생각이 난다.잘 모르는 상사가“아가씨”라고 불러서“몇번 아가씨요?”하고 면박을 줬다던가.심하긴 심했다.하지만 이 얘기를 들은 친구들하고는“왜요,아저씨?”할걸 그랬다고 배꼽을 잡았었다.만일 직장에서'아줌마'하고 부르면 어쩌지? 댁같은 조카 둔 적 없다고 할까.“손님,잔액이 모자라서 이체가….” 은행문을 들어서서'김아무개손님'으로 불리자 제법 마음이 편해진다.뭐라고요? 현금자동지급기 앞에서 은행직원 말을 듣자니 뒤편에 머리 희끗한 여자 손님이 시간이 급한 눈치다.잠깐 망설이다 말을 건넨다.“아주머니,먼저 하세요.” 그래,나 김아무개도 아주머니,아줌마다.그냥 아줌마가 아니고,어머니고 아내다.남편봉급에 따로 내몫은 안나오지만 가사노동과 육아로 대한민국 경제에 기여할 만큼은 기여하는 어엿한'주부'다.물건 사러 가면'손님'이고,투표장에 가면'유권자'다.맞은 편 704호에서는 나보고'우리 아파트 큰 일꾼'이라고도 하지 않나.내친 김에 아파트 동대표에 한번 나가볼거나.전에는 세대주,그래서 남자들만 하던 걸 상계동 어느 아줌마가 바꿔놨다고 했지.

*여성계 목소리

여성학자 오숙희씨는'아줌마'를“주부라는 존재가 지닌 빛과 그림자”라고 표현한다.'빛'은 생활능력면에서 실리적이고 구체적이면서도 푸근하고 정감있는 아줌마 이미지.'그림자'는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다시 말해 가사와 육아에 헌신하다못해 나중에는 아이들과 대화도 잘 안될만큼 자기관리에 소홀한'푹 퍼진'아줌마 이미지다.

나쁜 경우 가족이기주의적인 모습도 곧잘 보인다.“내 아이처럼 남의 아이도 소중하다”가 아니라“내 아이는 소중하다,내 아이만큼은 최고로 키워야 되겠다”는 미시(missy)를 내세운 분유광고처럼 되는 것이다.

한국여성민우회의 박진경차장은“우리 사회에서'아줌마'와'아저씨'는 대등하지 못하다”는 말로 기혼여성.주부에 대한 비하시각을 지적한다.이 이면에는 가사와 육아등'여성의 일'이 정당한 사회적 가치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현실이 깔려있다.

여성노동력의 사회참여가 직장취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지난달 이 단체는 취업여부와 상관없이 각종 시민운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적극 참여하는'사회주부'선언식을 개최한 바 있다.

'아줌마'는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묘사하는데도 곧잘 동원된다.'국내에서 처음 이사로 승진한 보험아줌마''환경문제 해결 내걸고 구의원 당선된 공해아줌마',심지어 책 제목도'변호사 아줌마,이럴 땐 어떻게 하나요'다.탈권위주의적으로 들리는 어법이기는 해도 만능(萬能)은 아니다.올해초'성차별적 언어 사용에 관한 연구'를 펴낸 한국여성개발원 김이선.이춘아 연구원은“직장에서 여성에게 미스 아무개,아가씨등의 호칭이나'언니'같은 관계어를 사용하는 것은 여성을 공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표현”이라고 지적하면서“직함이 있을 때면 직함으로,없을 때는 아무개씨라고 호칭할 것”을 권한다. <이후남 기자>

<사진설명>

자세히 들여다보자.'아줌마'에게도 얼마나 여러가지모습이

있는지.가정에서,사회에서,또 자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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