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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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키 큰 형사가 우풍을 경찰서로 데리고 들어가 자기 책상 앞에 앉혀놓았다.그러더니,“야,일어나 봐.너 호주머니에 있는 거 다 꺼내놔.” 하며 상의와 바지 호주머니를 조사하였다.호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와 크리넥스 휴지뿐이었다.크리넥스 휴지가 호주머니에서 나올 때 우풍은 아차,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이것 봐라.여자 루주가 묻은 휴지잖아.이거 어디서 난 거야? 강간하려던 여자 입술을 찍은 거야,뭐야?너,변태야?” 형사가 휴지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어머니 거예요.아버지랑 헤어질 때 남겨놓고 간 어머니 입술 루주거든요.”“2년 전에 부모가 이혼했다고 했는데,2년 동안이나 이 휴지를 간직했단 말이야.말도 안 돼.이 휴지는 새거야,새거.”“크리넥스 휴지는 2년이 지나도 새거란 말이에요.”“그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를 해봐야겠군.이 휴지가 언제적 휴지냐 하고 말이야.아마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생긴 이래 이런 의뢰는 처음 받아볼 거야.하긴 정액이 묻은 휴지들은 많이들 검사했겠지만 말이야.” 형사는 루주 묻은 휴지도 중요한 증거물이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얼굴에 떠올리며 비닐 봉지에 그 휴지를 집어넣어 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원지와 주인 아줌마 최민순이 경찰서로 달려와 우풍과 대면하였다.형사는 우풍에게 등산모와 마스크를 씌운 후 먼저 원지로 하여금 우풍과 대면하도록 하였다.원지는 형사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증거물들을 훑어보다 말고 비닐 봉지에 든 휴지에 시선이 박혔다.

“아주머니,이 휴지 기억나세요?.” 형사가 재빨리 눈치를 채고 원지에게 물었다.

“그럼요.기억나다말다요.내 입술인 걸요.”“그럼 이놈이 그놈 맞아요? 아주머니를 성폭행하려고 했던….” 형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성폭행이라는 말은 아주 낮게 발음하였다.원지가 등산모에 마스크를 쓴 우풍을 흘끗 쳐다보더니만 부르르 몸부터 떨었다.

“맞아요.그놈이 맞아요.” 원지가 작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주머니,지난번에 신고할 때 그놈이 물방울 같은 하얀 무늬가 촘촘히 박힌 검정 팬티를 입고 있었다고 했죠? 야,바지 내려서 팬티 보여봐.” 우풍은 얼떨결에 바지를 내려 팬티를 형사와 원지에게 보여주었다.그런데 우풍의 팬티는 검은색이긴 한데 무늬가 물방울 모양이 아니라 번갯불 모양으로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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