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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나 예수는 황홀한 경지를 선사하노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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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호 33면

제2 롯데월드의 건축 허가를 놓고 논란이 많다. 남산의 높이가 해발 243m, 남산타워의 높이가 236m, 도합 479.7m인데 롯데월드의 높이는 112층 555m에 이른다. 남산타워 꼭대기 피뢰침보다 더 높게 짓겠다는 것이다. 하늘에 더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건축사에서는 고딕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면, 롯데월드는 하늘을 향한 신앙심의 극치라고나 해야 할까? 높고 좋은 건물을 짓겠다는 것을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으나 도대체 왜 그런 건물을 짓는지, 짓고 난 후에는 어떻게 그것을 유지하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건물의 내용에 하등의 새로운 창조적 문명의 패러다임이 없는 것이다. 기존 상권을 빨아 잡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망각하는 것은 20층만 넘어가도 화재 시 소방서가 할 일이 별로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칼릴 지브란이 태어난 브샤레 마을을 바라보면서 인류문명의 21세기적 패러다임은 이런 모습에 있지 않을까,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영험스러운 인간의 삶이 생동치는 새로운 커뮤니티의 모습을 나는 목도하고 있었다. 임진권 기자

제17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희에게 여태 눈이 보지 못한 것, 귀가 듣지 못한 것, 손이 만지지 못한 것,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 한 것을 주리라.”
1 Jesus said, “I shall give you what no eye has seen, what no ear has heard, what no hand has touched, what has not arisen in the human mind.”

89.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우리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며, 헬레니즘 문명권의 사람이며, 페니키아 문명의 전통 속에서 활동한 사람이며, 아시아 대륙의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탈리아 미남형의 구레나룻 털보 남자로 생각하거나 서구라파 전통 속에 갇혀 버린 전형적 서양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장의 예수 말씀도 그 본래적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서구적 신비주의(mysticism)의 맥락에서 오묘하게 해석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 주석가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브샤레 마을의 입구.

노자의 『길과 얻음』(道德經) 제14장을 펼쳐 보라!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 ,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희·미,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아니 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 하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물체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 없는 모습이요, 물체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를 일컬어 홀황(惚恍)하다 하도다.

놀랍게도 예수의 말과 노자의 말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처음의 삼자, 볼 수 없는 것(the invisible), 들을 수 없는 것(the inaudible), 만질 수 없는 것(the intangible)이 순서도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이 이·희·미 삼자는 논리적으로 꼬치꼬치 따져 규명할 수 없다는 노자의 말은 예수에게서는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 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다. 즉 인간의 개념적 언어인식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일자 즉 하나(the One)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브란의 그림. 눈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귀가 듣지 못한 것을 듣고, 손이 만지지 못한 것을 만지는 어떤 몸짓의 표현이리라.

하나는 곧 전체인 것이다. 그 하나는 모습 없는 모습이요, 물체 없는 형상이다. 모습은 모습이되 모습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를 노자는 홀황(惚恍)이라 표현했다. 우리말의 ‘황홀’이라는 말이 바로 『노자』 제14장에서 유래된 말이다. 예수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이 황홀의 경지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뜻을 해설하기 전에 고린도전서 2:9를 펼쳐 보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기록된 바”라고 하여 인용한 이 구절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4복음서가 쓰이기 이전에 죽은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의 메시지는 4복음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사야 64:3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나 그 의미맥락이 전혀 다르다. 바울이 도마복음서를 인용하였다고는 생각하기는 어려우나 최소한 도마복음서의 자료가 된 어떤 전승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성서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고 있다.

큐복음서 제33장(마 13:16~17, 눅 10:23~24)에 나오는 “너희가 지금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라는 예수의 말씀도 본 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본 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황홀”의 해석에 있다. 마태 13:17이 말하듯이 “볼 수 없는 것”은 결코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에 의하여 선사되는 그 무엇이다. 여태까지 최고 권력자들인, 선지자나 왕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그 눈이야말로 복된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드는 데 바로 예수나 노자의 말씀의 위력이 존하는 것이다.

볼 수 없는 것, 들을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객관적 사유 속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이라는 것도 개념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황홀이란 결코 신비로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명(有名)의 세계에 대하여 무명(無名)을 말할 뿐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유명이란 유욕(有欲)의 다른 말이요, 무명이란 무욕(無欲)의 다른 말이다. 인간은 결코 개념적 인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개념적 인식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 고착성이다. 고착적 개념은 그릇된 욕망을 자아낸다. 인간의 과도한 분별지(分別智)는 항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니지만, 고착된 개념을 향한 집착은 인간을 독선과 오만과 번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만다. 집착이나 욕심·욕정이 사라지면 분별지는 무분별지로 전식(轉識)하게 되고, 무명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수에게서 선물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당만 짓고 세속적 축복만을 갈망하고 물리적 번영만을 기구(祈求)한다. 초기 예수운동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였다.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들을 수 있는 것을 버리고 들리지 않는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추구의 핵심은 나 존재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다. 욕망의 부정은 욕망의 근절이 아니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 마음속에 통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들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어찌 세속의 형상에 집착하는 자들을 예수를 믿는 자라 말할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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