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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그후 15년] 上. 중국 민주화 어떻게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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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 19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전차들. [중앙포토]

1989년 6월 4일, 중국 당국은 베이징(北京) 천안문(天安門)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민을 무력 진압했다. 그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살펴본다.

베이징(北京) 천안문 광장은 늘 조용하다. 중국 각 지방에서 놀러 온 중국인 관광객과 외국 여행객들이 서로 섞여 인민대회당과 역사박물관, 마오쩌둥(毛澤東)기념관, 고색창연한 자금성(紫禁城)을 둘러볼 뿐이다.

물론 공안(公安)차량이 광장을 순회하고 사복 경찰이 오가는 인파를 주시한다. 19년 '5.4 운동'이 시작된 이래 이곳은 늘 중국 정치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을 차지해 왔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 발표로는 300여명, 외신 보도로는 1500~2000명의 학생 등 시위자가 89년 이곳에서 죽었다. 베이징대와 칭화(淸華)대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개혁.개방에 걸맞은 정치 민주화를 추진하라"는 요구를 앞세우고 시위를 했다. 이들은 '관다오(官倒:고위 관료의 독식) 금지' '태자당(太子黨:고위 관료의 자녀들)의 부정부패 척결' 등의 구호도 내걸었다. 그러나 6월 4일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운 인민해방군 진압대는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두달여 지속된 평화적 시위는 끝내 유혈 참극으로 막을 내렸다.

중국의 일부 지식인은 "억울하게 죽어간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6.4 사태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외교부의 류젠차오(劉建超)대변인은 1일 브리핑에서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취해진 당시의 조치는 현재 중국의 발전 상황으로 볼 때 매우 정확한 것으로 증명됐다"는 기존의 입장을 다시 밝혔다.

역설적으로 류 대변인의 말은 맞는지 모른다. 비록 공산당 지배를 확고하게 지키기 위해 강경 진압을 했던 것이지만 중국은 지금 어떤 의미에서도 공산주의 국가라 할 수 없다. 정치적 다원주의는 아직 미약하지만 경제.문화.사회적 다원주의는 이미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의 정신을 둘러싼 젊은 학생들과 늙은 공산당 영도자들의 싸움은 학생들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최근 4세대 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국가주석은 각계의 전문가에게 자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대국들은 어떻게 흥망을 거듭했는지, 세계 경제와 각국의 군사력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헌법은 어떻게 고쳐져야 하는지, 위기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고 지역안보 문제는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 각계 전문가의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이들 전문가와의 회의는 보통 60분에서 90분간의 강의와 함께 지도자들이 질문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정치국원 22명이 모두 모이거나 내각 각료들이 참석하며 매달 한 차례씩으로 사실상 정례화됐다고 한다. 부분적이나마 중국의 의사결정 과정이 다양화됐으며 과거의 공산당처럼 무오류성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실제 정치 부분에서도 나름대로 개혁조치를 취하고 있다. 80년대 말에 선보이기 시작한 지방 최하 행정단위인 촌(村)의 촌장을 주민들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제도 역시 차츰 범위를 넓혀 실시하고 있다. 올 1월에는 후베이(湖北)성 윈멍(雲夢)현에서는 현의 최고 지도자인 당위원회 서기를 경선과정을 거쳐 직접 투표로 뽑는 선거가 실시됐고 베이징의 일부 구(區)에서도 구민들이 구장을 직접 선출하고 있다.

지난 3월엔 고위 공직자 감독 조례를 제정해 중국의 고질적 관료 부패 척결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위 관료들의 부패는 여전하다. 홍콩과 광저우(廣州)에서의 탄압 사례에서 보듯 언론자유도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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