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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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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작곡가 박재은(53)씨는 올 3월 다시 학생이 된다. 그는 원래 경희대, 가톨릭대, 이화여대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그런데 그가 공부하기로 한 것은 음악이 아니다. 50이 넘은 나이에 고려대 글로벌 MBA에 합격한 그는 앞으로 경영학적 지식을 활용해 문화콘텐트 사업 분야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의 꿈은 음악을 하는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생계 걱정 없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열도록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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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상민 기자

경제가 어려울 때 음악 이야기나 하는 것은 한가로워 보일지 모른다. 사실 경기가 좋을 때도 그렇다. 음악 특히 클래식 음악이란, 돈을 버는 도구라기보다는 돈을 쓰는 대상에 가깝다. 음악 이야기 해 봤자 돈도 떡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작곡가 박재은씨의 MBA 도전기 #53세 대학 강사의 변신 … 문화 콘텐트 쪽 일자리 넓히고 싶어

그러나 올해 고려대 MBA과정 학생이 되는 작곡가 박재은씨의 생각은 다르다. ‘클래식 작곡으로 돈 벌 수 있다.’ ‘음대생도 사회 각 분야에서 밥벌이 할 수 있다.’그의 생각에 가장 의문을 갖는 사람은 정작 그의 제자들이다. “좋은 곡 써서 돈 벌자”고 말하면 그의 제자들은 “선생님, 정말 힘 나는 이야기예요”라고 말하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씁쓸한 미소는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작곡과 나와서 작곡으로 먹고사는 게 그리 녹록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작곡과 졸업생 지금 무얼 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 많은 작곡과 졸업생을 비롯해 음대 졸업생이 갈 만한 직장은 어디입니까?”올해는 작년보다 취업난이 심해질 전망이다. 유명 대학 경영대나 법대를 나온 사람도 취업 자리가 마땅치 않다고 고민하는 판에 작곡과 나온 사람이 괜찮은 직장에 갈 확률은 높지 않다.

“작곡과 나와서 가는 길은 크게 네 가지죠. 외국(대학원), 국내(대학원), 과외 및 취업 등이죠.”박재은 작곡가가 대학 강사로 활동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그렇다면 작곡을 배워서 우리가 과연 아이들에게 해줄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박재은 작곡가는 “교수는 학생이 주는 학비로 잘 먹고 잘사는데 학생이 졸업해서 갈 곳이 없다면 선생으로서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이런 학생도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일터가 구해졌다며 밝게 웃더니 “아는 형 식당 호객꾼이 됐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저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50을 넘은 나이에, 그것도 유명 대학 강사를 맡고 있음에도 MBA를 선택한 이유다. 박재은 작곡가는 철밥통보다는 일자리통이 되고 싶다.

“매년 새로 입학한 학생들이 교실 문을 들어오면 등 뒤에 보이지 않는 부양가족 3명까지 유령처럼 따라 들어옵니다. 악기가 비싸고 레슨비가 비싸니까 음악이나 요즘 소위 예술 하는 사람들은 재벌쯤 되는 줄 아는데, 실제로는 아닙니다.”우리나라에서 아직 클래식 작곡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것도 박재은 작곡가처럼 업계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에 한정된 경우가 많다.

“교수가 만들어 볼 수 있는 혹은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자리는 기껏해야 10여 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클래식 음악계 및 문화산업이 발전하면 수백, 수천의 재능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작정이 아니라 경영학적 감각이 필요하겠죠. 공부로 풀어보겠다는 생각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음악 하는 사람들은 음악 하는 사람끼리의 세계에 파묻히는 경향이 있어 공부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MBA 졸업 후 그의 꿈은 MBA과정에서 얻은 경영학적 지식을 활용해 문화 콘텐트 사업 분야에 일조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정부 지원금 등이 문화산업 전반에 지원되는 것의 효과를 따져 봤다”며 “막대한 지원금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역할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지원금이 제대로 사용됐는지 평가해 다음 지원금 배분에 영향을 미치도록 한다면 눈먼 돈이 떠돈다거나 밥그릇 싸움이 심화되는 일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회계지식을 활용하고 마케팅적 관점을 갖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남들이 35세 전후에 경력 전환의 계기로 MBA를 선택하는 데 비해 53세란 나이가 늦은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기업이 있는 것도 아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찾아주는 데 일조하겠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 아니냐고 말이다.

“고려대에 시험 보러 갔더니 제가 선생처럼 생겼는지, 면접 어디서 보는 거냐고 공손하게 묻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나이로 보면 제가 가장 늦둥이죠. 우리 제자들이나 저와 비슷한 길을 걸어 온 후배들에게 이렇게 늦게 하는 사람도 있는데, 힘을 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습니다.”

철밥통보다 일자리통 되고 싶어

하나의 선례가 되고 싶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자신이 선례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87년 서울시향에 작곡을 해줬는데 돈을 주지 않더라고요. 제가 ‘작곡비는요?’라고 물으니 오히려 이상하게 쳐다봅디다. 담당 과장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아무도 작곡 값을 받아간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꼭 작곡 값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다음 사람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무슨 독립운동 하는 사람도 아닌데 말입니다. 포스터까지 다 찍은 상태에서 제 곡을 빼는 것은 무리이기에 ‘제 곡 쓰지 마십시오’라고 엄포를 놓은 끝에 받은 돈이 100만 원. 그때 이후로 서울시향에서 공짜 작곡이라는 선례는 없어졌습니다.”

적당한 대가가 오가는 시장에서는 발전도 있는 법이다. 그는 일본의 동요 콩쿠르 제도를 모범사례로 제시했다.“전국적으로 열리는 한 일본의 어린이 피아노 콩쿠르에서는 세계의 작곡가를 모집합니다. 세계 각국의 문화가 녹아 있는 동요를 제작해 아이들에게 선택해 연주하게 합니다.

곡이 연주될 때마다 계산해 작곡가에게 비용을 지불합니다. 새로운 작품이 계속 나오면서 콩쿠르는 풍성해지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고, 음악인들에게 기회도 줍니다. 계획된 투자 속에서 1년에 한 번 있는 이벤트가 아니라 역사를 가진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가가 오가는 시장, 오래된 전통이 있어도 대중과의 소통이 없다면 문화 콘텐트 사업은 말짱 헛일이다. 2007년 제누스 오페라단의 상임이사로 ‘아이다’ ‘토스카’를 기획했던 경험에서 그는 이것을 확실히 배웠다고 한다. 친숙하지만 진부하고, 고상하지만 지루한 클래식 음악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는 대중문화 속에 은근히 아이다의 선율을 노출시켰다.

오페라는 어렵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1년 전부터 준비해온 결과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드라마 ‘불새’에서 테마송으로 아이다의 한 멜로디가 등장하고, 아이다의 출연가수가 인기 탤런트를 만나는 장면이 연예가 뉴스에 노출되면서 사람들이 아이다를 쉽게 느끼게 됐습니다.

오페라 아이다가 유명 가수 출신 배우 없이도 관객 점유율이 높았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다란 제목의 일본 인기 만화책까지 번역 출판하고 싶었는데, 그건 시간이 촉박해 하지 못했죠. 했다면 어땠을지 지금도 궁금하네요.”‘박재은 학생’은 새로운 시작에 설레는 표정이었다. 누구나 다 아는 업적을 남긴 화려한 작곡가는 아니지만, 대중을 가장 잘 아는 작곡가·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그는 제자들이 더 많은 일자리를 갖는 그날까지 새로운 도전을 해 나갈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이코노미스트 임성은 기자 lseco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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