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97고양 세계꽃박람회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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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고양시에서는 ‘꽃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국내 최대 꽃축제인 ‘97고양세계꽃박람회’가 지난 3일 개막돼 18일까지 일산 호수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꽃잔치를 젊은 시인 나희덕씨가 둘러보고 꽃에 대한 시인의 시각과 감성을 담아왔다.

나희덕(시인)

세계꽃박람회가 일산 호수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집이 가까운 덕에 평소에도 한시간 남짓 그곳을 산책하곤 했다.행사 때문에 평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차도 많고 사람도 많지만 꽃은 더 많았다.눈과 코가 얼얼하도록 꽃을 보고나니 꽃멀미가 날 지경이다.상품화된 꽃보다 산에 피어난 꽃이 더 좋지만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것도 웬 복인가 싶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원이었다.꽃길을 따라 점자판이 깔려 있어 만져보기도 하고 냄새도 맡으면서 그 꽃들의 이름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꽃이 꽃일 수 있는 것은 향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꽃의 향기가 단순히 종족번식을 위해 벌을 부르는 수단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 향기는 꽃이 인간에게 온몸으로 건네는 언어이기도 하다.그래서인지 현란한 광장의 꽃들보다도 작은 공간에 피어나는 꽃들이야말로 자기를 읽어줄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화원에 들어가 걷고 싶었다.마치 꽃을 처음 만지는 사람처럼,꽃향기에 처음 취해보는 사람처럼,꽃들을 만나고 싶었다.대체 인간은 꽃과 언제부터 만나온 것일까.태어나서 제일 먼저 아름다움을 배운 것도,소유한 것도 손에 꺾어든 몇 송이 꽃을 통해서가 아니었을까.그리고 그 꽃이 생기를 잃고 시드는 순간 느꼈던 감정이 바로 상실감이나 죄책감의 시작이 아니었을까.이처럼 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절망을 함께 가르쳐준 영원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경이감을 상실한 채 빛을 잃어가는 상징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꽃 역시 너무 흔해졌기 때문에 그 빛과 향기를 잃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사시사철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살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 황홀한 신비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신비가 사라진 시대의 불행을 우리는 저 꽃들과 더불어 겪고 있는 셈이다. 아침마다 걸치고 나서는 낡은 양복처럼 우리의 눈은 낡고 둔감해진지 오래다.그 개안(開眼)을 위해서라도 시각장애인 화원에 들어가고 싶었다.그러나 그러지는 못했다.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린 자에게는 그 화원의 문이 굳게 잠겨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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