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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오른 기업 옥석 가리기 최대 관건은 채권단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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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뉴스 분석 기업 구조조정의 스타트는 빨리 끊었다. 금융감독원은 ‘옥석 가리기’ 작업에 보름 정도의 여유를 줬다. 촉박해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은행들은 지난해부터 건설·조선사 문제로 고민해 왔기 때문에 대상 기업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 굳이 마감을 정한 것은 감독당국으로서 구조조정의 의지를 확인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김종창 금감원장은 새해 임원회의에서 “금융 불안과 실물 위축의 고리를 조기에 끊기 위해 신속한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외환위기 때도 경험했지만 매끄럽고 일사불란한 구조조정이란 있을 수 없다. 이해관계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조정이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채권단 내부의 마찰이다. 예컨대 주채권은행이 C등급을 매긴 기업은 채권단 공동관리(워크아웃)에 들어간다. 채권단 내의 분란은 여기서부터 일어난다. 채권단은 채권액 비중에 따라 자금 지원을 결정하고, 자산 매각·감원과 같은 자구노력을 기업에 요구한다. 그러나 각 금융회사의 형편에 따라 지원이나 구조조정 방안에서 의견이 엇갈리곤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C&중공업이다. 이 회사에 대한 채권액 비중이 51.5%인 메리츠화재는 그에 맞춰 배정된 긴급자금을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대출이 아니라 보증을 서 준 것이니 은행과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계획된 구조조정 일정이 한 달 이상 늦어지고 있다.

물론 워크아웃과 관련한 최종 심의·의결 기구인 채권금융기관 조정협의회가 중재에 나설 수는 있다. 그러나 C&중공업의 경우 조정협의회에 안건을 넘기자는 방안조차 채권단 표결에서 부결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견 조선업체의 재무담당자는 “금융당국이 모든 문제를 채권단에 맡겨 놓을 게 아니라 마찰을 빚는 세부 사안을 직접 해결해야만 실타래가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건설업체의 워크아웃도 은행권과 제2금융권이 지원액 분담을 놓고 마찰을 빚을 공산이 크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정상규 변호사는 “지금은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기업의 부실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 은행이나 기업 모두가 부실 정리에 소극적”이라며 “정부 의지와는 달리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 평가의 신뢰성과 기준도 논란 거리다. 신용평가 태스크포스팀이 마련한 기준에 따르면 비상장사의 경우 내부 가결산 자료를 활용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외부감사를 받지 않은 자료를 쓸 경우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을뿐더러 해당 기업이 평가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건설업체의 임원은 “어떤 방식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받았는지에 따라 부채 비율이 크게 달라진다”며 “이런 점을 반영하지 않으면 누구도 평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평가 기준의 하나인 경영진의 평판이나 소유·지배 구조에 대한 평가는 너무 주관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부당한 기준에 따랐다”며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구조조정이 자칫 시간의 늪 속에 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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