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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알짜 벤처 창업자들 "사장님 밑에서 일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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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사례 1 게임업체 넥슨은 지난해 매출 650억원에 당기순이익 210억원을 올린 '알짜'업체다. 이 회사의 창업자이자 지분의 50% 이상을 갖고 있는 김정주(36)씨는 현재 넥슨의 회장이나 최고경영자(CEO)가 아니다.

넥슨의 자회사인 모바일 핸즈의 대표를 맡고 있다. 말이 좋아 자회사지 모바일 핸즈는 역삼동 넥슨 사옥 내에 있는, 직원 40명가량인 회사다. 굳이 따지자면 넥슨의 한 부서 정도의 규모다. 넥슨의 CEO는 올 초 취임한 27세의 서원일 대표다. 그는 지분 하나 없는 전문경영인이다.

김 사장은 1999년 국내 최초의 온라인 게임인 '바람의 나라'가 빅히트하면서 회사가 급성장한 뒤 경영에서 물러났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게임업계에서는 좀더 젊고 유능한 경영자가 회사를 맡는 것이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서 대표는 "김 사장은 회사 사업 중 극히 일부분인 모바일 게임에 전념하며, 한발 떨어져 회사를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임 CEO이자 2대 주주인 정상원씨도 지난 2월 CEO에서 물러난 뒤 회사의 개발 총괄본부장을 맡아 사장의 직속 부하로 일하고 있다. 매일 아침 열리는 각 본부장 회의 때 정씨가 얼마 전까지 부하였던 서 대표에게 보고하는 장면이 이젠 이 회사에선 익숙한 풍경이 됐다.

#사례 2 창업자가 전문경영인 밑에서 일하는 또 하나의 회사가 네오위즈다. 이 회사는 세이클럽과 게임포털 '피망'을 갖고 있는 알짜 인터넷 업체다. 최근 군에서 제대한 나성균(33).장병규(31)씨는 각각 회사 지분의 17.7%와 14.9%를 소유하고 있다. 두 창업자는 최근 회사로 돌아오면서 전문경영인인 박진환(32)사장의 밑으로 들어왔다. 회사 측은 "이번달 말 정확한 직책이 결정되겠지만 두 창업자가 박 사장 밑에서 각각 하나의 부문을 맡아 일한다는 방침은 확정됐다"고 밝혔다.

박 사장은 그동안 뛰어난 경영실적을 올렸다. 세이클럽으로 출발한 네오위즈는 박 사장 재임 기간에 게임 산업에 진출, 피망을 이 분야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공적이 있다.

#사례 3 네이버의 창업자이자 개인 최대주주(5.7%)인 이해진(37)씨도 현재 이 회사의 부사장을 맡고 있다. 회사의 주요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전략담당 책임자(CSO)로서 CEO인 김범수(38)사장을 보좌한다. 매일 아침 열리는 임원회의 때는 당연히 김 시장이 사각 테이블의 상석에 자리를 잡는다. 김 사장은 지분이 2.3%에 불과하고, 더구나 이 부사장이 만든 네이버가 김 사장이 만든 한게임을 합병했음을 감안한다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구도다. 김 사장은 "내가 회사의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대외적인 일을 담당한다면, 이 부사장은 회사의 큰 틀을 짜는 효율적인 역할분담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회사는 2000년 합병한 뒤 김 사장은 게임 분야, 이 부사장은 포털 분야를 맡는 공동 대표로 일해 왔다. 하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투톱 체제에 문제가 생겼고, 이를 바꾸는 과정에서 지분의 많고 적음을 떠나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게 보직을 정했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서로는 다소 어색해 보이는 이런 구도는 이들 회사의 역사가 짧고 경영진이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치열한 환경에서 회사 생존을 위해 직책의 높낮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유연한 벤처사고에서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다.

외국에서도 주로 IT 업계를 중심으로 창업자가 회사에 있으면서 CEO를 물려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가 그런 경우고, 델 컴퓨터의 마이클 델도 다음달 CEO 자리를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준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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