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차이메리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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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80년대 중반 영국의 한 제약회사가 항우울제 뷰로핀의 임상시험을 했다. 놀랍게도 흡연 환자들의 경우 하나같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가 싹 사라졌다. 니코틴과 항우울제가 비슷한 역할을 한 것이다. 니코틴은 뇌 속에서 쾌락을 관장하는 화학물질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한다. 흡연자가 담배를 끊기가 그리 힘든 이유다. 익숙한 쾌락과 결별하고 우울·불안·초조와 맞서 싸울 결연한 의지가 없다면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기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새해 결심으로 달콤한 중독과의 절연을 고심 중인 건 흡연자들만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이 딱 그런 처지다. 두 나라는 지난 수십 년간 서로가 서로를 중독시키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호시절을 구가했다. 값싼 ‘메이드 인 차이나’ 상품을 속속 사주는 미국이 있어 중국 경제는 두 자릿수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수출로 번 막대한 달러를 중국은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 그 덕에 미국인들은 앞다퉈 대출을 받아 큰 차와 큰 집을 살 수 있었다. 정부나 국민이나 빚 무서운 줄 모르고 남의 돈으로 흥청망청 살아온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상호 중독 상태를 하버드대 교수(경제사학) 니알 퍼거슨은 ‘차이메리카(Chimerica)’라고 명명했다. ‘차이메리카’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경제위기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최근 뉴욕 타임스는 “쓸 줄은 모르고 모을 줄만 아는 중국이 저리로 돈을 빌려준 탓에 미국의 소비 광풍, 주택 시장 버블이 촉발됐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누구 책임이 더 큰지를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편집장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저서 『포스트 아메리칸 월드』에서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미·중 경제를 냉전시대의 ‘상호확증파괴(MAD)’ 에 비유했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궤멸시킬 핵무기를 갖춘 게 오히려 핵전쟁을 억지했던 것처럼 미국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공포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차이메리카’로 인한 평화와 번영 역시 허상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금단의 고통이 크더라도 미국과 중국은 중독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은 수출 경쟁력을 개선해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고, 중국은 소비를 촉진해 수출 부진으로 인한 경기 침체를 막으라는 게 전문가들 처방이다. 쉽진 않겠지만 그게 두 나라를 살릴 묘약인데 어쩌겠나.

신예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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