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잡아라>30代 무역업자 통해본 영세수입商의 애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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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나래통상 최진한(崔鎭漢.31)사장은 무역업자다.그러나 말이 무역업자지 사실은 외국에 나가 값싼 의류를 떨이로 사다 국내에서 파는'보따리 수입상'이다.그는 이 직업에 뛰어든 지난 2년간이 20년만큼이나 고달팠다.수입품으로 한몫 잡을

것같던 환상은 온데간데 없어졌다.구멍가게만한 무역업체 하나를 꾸려나가는 일이 이처럼 힘들지 몰랐다고 한숨짓는다.

崔사장은 자신이 살아온 길이 “우리 나라 영세 수입상의 애환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말한다.수천명의 영세 수입업자들이 벼락부자를 꿈꾸면서 해외의 재고의류시장을 뒷골목까지 누비고 다니지만 대부분 쓴잔을 들이킨채 돌아선다는 것이다.

崔사장이 무역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11월.마침 그때는 병행수입이 허용된 직후였다.그때까지는 상표권 전용사용권자에게만 그 브랜드의 제품 수입을 허용했으나 병행수입제 실시로 아무나 들여올 수 있도록 수입자격 제한을 풀었던 것이다.그는 수입품목으로 리바이스 청바지를 택했다.유명 브랜드니까 수입만 해오면 저절로 팔리고 높은 마진도 챙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이같은 기대는 출발에서부터 암초에 부딪쳤다.한번은 해외시장에서 산 리바이스가 가짜로 밝혀져 곤욕을 치렀다.

崔사장은 멕시코에서 물건을 떼어온다.'땡처리'시장을 전전해봤지만 가짜에 속을 위험이 크기 때문에 멕시코시티 공장을 선택했다.현지공장에서'빼돌리는'물량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는 이를 위해 며칠밤을 지새우는 일에 이골이 났다.심지어 임

금이 낮은 공장 근로자를 뒷돈으로 구슬려 물건을 빼돌리는'007작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진짜 리바이스를 들여와도 판로를 개척하는게 간단치 않다.崔사장은“영세업자가 유통망을 뚫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고 말한다.남대문.동대문시장을 다짜고짜 찾아가 거래처를 직접 뚫어야 했다.

베테랑 상인들이 햇병아리 崔사장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값을 후려치는 바람에 밑지고 팔기가 일쑤였다.

여기서도 소화하지 못하면 그는 보따리를 메고 의류가게가 몰려있는 문정동.이화여대입구로 정처없는 방랑에 나서는 신세가 된다.

崔사장은 한벌에 2만6천~2만8천원에 수입해온 청바지를 잘해야 3만9천원에 팔아 2천~3천원을 순익으로 손에 쥔다.그는 “돈이 급해 동대문.남대문시장에 도매로 넘길 때는 3만원이 보통”이라며“제철을 놓치면 2만원까지 내려가는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유행에 맞지 않거나 사이즈가 터무니없이 커서 외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리바이 스트라우스 코리아는 한국인 취향을 수시로 반영하면서 제품을 생산하지만 해외시장에서 사오는 재고는 그러질 못하기 때문이다. 최사장은 전주 우석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애틀랜타 머서대에서 MBA(경영학 석사)과정을 밟다가 무역업자로 변신한 케이스다.

그는 수입품으로 떼돈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란 환상에서 나래통상을 차렸으나 사무실운영이 버거울 정도인 요즘에는 학업포기를 내심 후회하고 있다.

병행수입 허용으로 리바이스 청바지에 덤벼들었던 40여명의 수입업자도 지금은 10여명만이 남았다.지난 1년간 30여명이 적자로 손을 떼거나 도산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지난해말까지 국내에 들어온 외국의 유명의류브랜드는 모두 5백87개.이를 수입하는데 2백여개 무역업체가 매달려 있고 재고수입에 매달리는 속칭 보따리장수만도 수천명에 이를 것이란 추산이다.

최사장은“병행수입으로 들어오는 유명브랜드제품은 대부분 현지시장에서 1~2년 재고물량을 싸게 구입해오는 것”이라며“정상제품보다 값이 싸야만 국내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보니 재고품 수입에 치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올들어서는 불황여파로 수입품 시장에도 찬바람이 불어닥쳐 여간 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해만 해도 의류수입이 14억3천만달러로 전년비 41% 증가했던 것이 올 1~2월에는 2억3천만달러로 14.7% 늘어나는데 그쳤다.

최사장은“재고의류 수입이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라는 환상은 금물”이라며“가격파괴 바람이 거세어지면서 채산성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어 전업을 서두르는 업자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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