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과 김삿갓의 만남 - 금강산등 19곡 앨범녹음 30년 음악생활 결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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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신중현이 살고 있는 서울문정동의 스튜디오 ‘우드스톡’은 세상을 등진 선비가 은거하는 토굴같은 곳이다. 한때 지하카페였던 이곳에서 신중현은 분신같은 기타와 악보를 끼고 명상에 잠겨있다. 조그만 키의 그는 웃음도,슬픔도 저만치 떠나보낸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김추자·펄시스터즈를 키워낸 히트제조기에서 ‘대마초·금지곡 전문가수’를 오간 영욕의 시절들을 켜켜이 묻고 의연히 세월과 어깨겯고 선 고목을 연상시킨다.

뜻하지 않게 노래부르는 것이 금지됐던 시절 ‘무위자연’의 노장(老莊)사상을 읽으며 분노를 달랬다는 그가 최근 새앨범 ‘김삿갓’의 녹음을 마쳤다.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장원급제했지만 서얼의 자식이란 내력을 알자 모든 것을 버리고 유랑시인이 된 김삿갓에 비유한 것일까.‘돈’‘봉우리’‘눈’‘금강산’등 그의 시를 석달간 손수 19곡으로 옮긴 지금 신중현의 김삿갓에 대한 심정은 감정이입을 넘어 어떤 경외(敬畏)에 가깝다.

“모든 것을 버린채 이토록 아름답게 자연을 묘사해낸 사람을 본 일이 없어요.그이 시는 그냥 ‘예쁘다’자체예요.‘천리길 행장에 지팡이 하나로/주머니 속에 일곱푼 남겨서/오히려 많다고 생각했는데/들주막 석양에 술을 보았으니/어떠하겠느냐’같은 구절은 따로 사족이 필요없어요.” 김삿갓은 그와 함께한 첫 작사가가 된다.신중현은 2백여장 넘는 자작음반중 남의 작사를 받지도 원하지도 않았다.전부 자신이 가사를 썼다.그런만큼 이번 19곡은 곡마다 의도적인 겸손함과 독특한 한국적 정서로 경외하는 파트너에 대한 애정을 짙게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조선시대에 쓰인 김삿갓의 시를 20세기 서구에서 발원한 록에 맞춰 작곡한다는 것이 처음엔 너무 어려웠어요.아마도 제속에 들어간 김삿갓의 혼백이 아니었다면 이번 앨범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는 3년전부터 맡은 수원여전 교수직까지 휴직한채 석달간 이 앨범에만 온 힘을 쏟았다.작·편곡은 물론 기타·베이스·드럼까지 모두 그 혼자서 했다.연주인을 쓰면 악상이 날아가고 창작 당시의 감흥이 죽어버리기 때문이었다.결과는 로큰롤·사이키델릭부터 판소리·타령까지 신중현의 30년 음악이 결집된 덩어리로 나타났다.

19곡이 수록된 더블앨범은 이달말 출시예정이다. 대중성과 거리가 뚜렷한 사운드는 그가 점점 홀로만의 음악세계로 침잠해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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