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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세기를찾아서>12. 간디의 물레소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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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델리로 오는 길은 매우 먼 여정이었습니다.비행기 창문으로 넓은 대륙을 조감하기도 하고 플랫폼과 열차속에서 사람들과 짐더미속에 파묻혀 길을 잃기도 하고 햇볕이 불타는 시골길에 차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과 소·낙타·양·돼지들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 역동적(?)인 여정의 끝에 델리가 있었습니다.대통령궁·의사당·각국 대사관, 그리고 네루 플레이스와 사우스 익스텐션의 번화가는 서구의 도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얀 안개꽃 가운데 붉은 장미 한송이를 꽂으면 안개꽃이 더 아름답게 보이느냐, 아니면 장미꽃이 더 아름답게 보이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오늘 내가 당신에게 전하는 엽서는 그 질문에 대한 때늦은 답변은 아니지만 안개꽃과 장미,농촌과 도시, 그리고 간디와 네루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델리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간디기념관이었습니다.직원들도 아직 출근하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습니다.뜰에 간디가 홀로 서 있었습니다.2층에 있는 작은 거실에 간디의 유품이 있었습니다.낡은 슬리퍼 한 켤레,안경,피묻은 옷,그리고 그의 육신을 앗아간 총탄과 재를 담았던 항아리가 낮은 조명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비폭력 불복종, 그리고 무소유를 몸소 실천했던 그의 면모 그대로였습니다.아무도 없는 기념관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간디의 초상은 적적하였습니다.그러나 그곳에 전시돼 있는 현장사진들은 치열했던 그의 일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네루가 격찬했듯 ‘밑바닥을 흔드는 급소중의 급소를 꿰뚫어보는 천재’가 번뜩이고 있었습니다.간디의 천재는 식민지 인도의 독립운동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해방을 향한 ‘진리의 선언’으로 승화되어 있는 것이라 해야 합니다.

네루기념관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딸 인디라 간디의 방이었습니다.네루의 ‘옥중서간집’을 읽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그의 서간집은 나이니 형무소에서 13번째 생일을 맞는 딸 인디라 간디에게 띄우는 편지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독립과 함께 아버지는 총리가 되고 그립던 아버지 옆에 방을 갖게 된 딸 인디라 간디의 행복을 상상하는 일은 매우 마음 흐뭇하였습니다.그러나 아버지를 이은 총리 간디여사의 정치적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 총리의 피살에 생각이 미치면 인도가 헤쳐나온 현대사의 전개과정이 얼마나 가혹한 길이었던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나는 네루가 생전에 집무하던 총리관저의 영국풍 집무실과 서재, 그리고 장미 한송이가 헌화된 그의 영정을 지나 역시 장미꽃이 아름다운 정원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습니다.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이 사람은 진정으로 인도를 사랑하고 인도인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인도에 대한 네루의 애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러나 그 애정의 방법에 있어 간디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간디는 인도를 이끌고 가야 하는 것은 몇 개의 근대화된 도시가 아니라 수십만개의 인도마을과 민중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네루와 그가 중심이 된 인도국민회의파는 근대화된 도시와 엘리트를 주목하였습니다.당신은 간디가 바이샤계급의 평민출신이었음에 반하여 네루는 부유한 브라만계급 출신이며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인 해로와 케임브리지 출신이란 점을 들어 그 차이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아무리 절절한 애정을 그 속에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대상을 오히려 그르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이기 때문입니다.가장 분명한 사랑의 방법은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늘의 인도는 역시 네루의 방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델리와 뭄바이의 활기에서 그것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자체기술로 핵을 개발하고, 초음속 전투기를 만들고, 세계 2위의 소프트웨어 수출국인 인도의 도시는 분명 그러한 자신감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2억명이 넘는 중산층의 존재도 외국자본이 놓칠 수 없는 시장임에 틀림없습니다.아그라의 타지마할에서 서너명의 한국 상사원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도시가 농촌을 이끌고 가는 20세기의 근대화방식은 도처에서 실패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도인과,특히 인도의 농촌과 함께 가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간디의 물레 앞에서 그의 진리의 길,그의 사랑의 방법을 생각합니다.외국제품을 불사르느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현명하다는 타고르의 반론에 대하여 간디는 그것을 불태울 때 우리는 수치심도 함께 태웠다고 대답하였습니다.영어교육을 주장하는 타고르에 대하여 그는 영어교육은 결국 인도인으로 하여금 영국인이 인도인을 대하듯 하도록 교육하게 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그가 이끌었던 비폭력 불복종운동이 식민지 인도의 거대한 잠재력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세웠듯이 그의 무소유(Non-possession)사상은 현대자본주의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메시지라고 생각되었습니다.무소유는 간디경제학의 기본원리며 근대경제학에 대한 강한 비판이론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소유하지 않으며 쌓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무소유이론은 거대자본의 전횡을 포위할 수 있는 비폭력 불복종투쟁의 경제학적 변용이면서 새로운 세기의 문명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에게 ‘진보는 삶의 단순화’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경제학의 비극은 경제학이 도덕철학으로부터 유리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였습니다.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의 세계로부터 도덕철학을 버리고 ‘국부론’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생각하면 근대경제학은 그것이 가장 과학적일 때 가장 비합리적이 된다는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간디의 시신이 화장된 곳에 놓여 있는 제단을 찾아갔습니다.조국의 분리독립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단식에 들어갔으며 최후까지 통일인도를 주장하다 총탄에 쓰러진 간디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곳입니다.운명의 순간에 외쳤던 최후의 말 한마디가 새겨져 있습니다. ‘헤 람’(오 신이여).그러나 간디의 신은 진리입니다(God is truth).

간디제단을 돌아 나오면서 나는 다시 인도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릭샤를 바라보았습니다.릭샤란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입니다.5~6명이나 되는 한 가족이 그 좁은 자리에 가득히 타고 있고 릭샤꾼은 메마른 궁둥이를 안장에서 들어 올려 온몸으로 페달을 밟고 있었습니다.몇 개의 도시가 수많은 농촌을 끌고 갈 수 없다는 간디의 목소리를 눈으로 보는 듯하였습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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