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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공포’로 한국 사회 무엇을 잃었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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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 4월 29일 밤. MBC ‘PD수첩’ 화면에는 암울한 음악과 함께 미국 소들이 힘없이 쓰러지는 장면이 방송됐다. 곧이어 인간 광우병으로 숨졌을 수 있다는 미국 여성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국인이 광우병에 더 취약하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충격적인 방송 내용은 국민을 ‘광우병 공포’로 몰아넣었다. 4월 18일 한·미 양국이 쇠고기 시장을 개방하기로 합의한 후 인터넷에서 괴담으로 떠돌던 풍문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5월 2일 서울 광화문에선 1차 촛불집회가 열렸고, 집회는 꼬리를 물고 8월까지 이어졌다. ‘오래 살고 싶어요’라는 피켓을 들고 나온 여고생도 있었고, 아이들 급식 걱정에 생전 처음 거리로 나선 어머니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경찰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불법 시위로 변질됐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는 ‘청와대로 가자’는 주장이 넘쳐났다. 야당 의원들이 불법 시위에 동참했고, 정치적 구호도 난무했다. 전문가들의 설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PD수첩이 인용한 논문의 저자가 직접 나서 “한국인이 인간 광우병(vCJD)에 잘 걸린다고 단정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렵다”고 해명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공포는 PD수첩의 번역을 맡았던 정지민씨가 나서면서 꺾이기 시작했다. 정씨는 “다우너 소(주저앉는 소)에 대해 광우병을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왜곡이라고 (제작진에게)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했다”고 말했다. 문제의 미국 여성의 사인도 인간 광우병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는 추가 협상을 통해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수입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법원은 7월 31일 농림수산식품부가 PD수첩을 상대로 낸 정정·반론보도 청구소송에서 농식품부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MBC는 8월 12일 사과 방송을 했다.

그러나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올해 촛불시위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3조7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쇠고기 사태가 진정된 후 새로 임명된 장태평 농식품부 장관은 취임 직후 “광우병 공포는 만들어진 공포”라고 규정했다.

정부 잘못도 크다. 괴담은 매우 구체적이었는데 식품의약품안전청이나 농식품부의 부족한 설명은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협상 과정에선 미국 측 문서를 오역하는 실수로 스스로 신뢰를 갉아먹었다. 한·미 정상회담 직전 협상이 타결되면서 정부가 미국에 준 ‘선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홍성기 아주대 교수는 “정부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간과했다”며 “확실한 안전 대책을 통해 식품당국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뒤틀렸던 구조는 시장을 통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7월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미국산 쇠고기는 인기를 모았다. 침묵하고 있었지만 값싼 쇠고기에 대한 수요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마트는 지난달 말 미국산 쇠고기를 판매한 지 나흘 만에 16억원어치를 팔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수요가 줄고 있다.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미국산 쇠고기의 가격 경쟁력이 줄어든 데다, 여전히 많은 소비자가 꺼림칙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소비자 선택을 통해 시장 질서가 잡혀갈 것”이라며 “미국 쇠고기에 대한 안전 규제가 느슨해지면 언제든 소비자들이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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