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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한글 아는 외국 대통령 나오는 꿈을 꾸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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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성균관대 사범대 이명학 학장이 해외에서의 한글 백일장을 구상한 건 지난해였습니다. 중국 대학생들 가운데 한글 붐이 일고 있는데 그걸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얘길 듣고나서였다고 하네요. 당장 반론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니, 국내 대학생도 백일장이라면 고개를 흔드는데 외국에서 한글 백일장이 말이 됩니까.”

누구나 해봄직한 지적이죠. 하지만 이 학장은 달리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해마다 수십만 명이 토플을 치르고 영어 에세이 시험을 보는데, 만일 한국어가 붐이라면 중국 학생들이 한글 백일장을 치르는 게 왜 안 될까’.

이 학장은 우선 중국어 HSK를 주관하는 베이징의 위옌(語言)대학과 연락해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 숫자를 확인했습니다. 55개 대학에서 약 5000명, 2~3년제를 포함하면 1만 명. 그 정도면 자원은 충분했습니다. 속속 도착하는 답변도 고무적이었습니다. “한국어는 영어 다음으로 인기가 좋다. 아주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한다.”

지난해 6월 16일 베이징 위옌대에서 열린 첫 번째 한글 백일장은 성황이었습니다. 대학별 자체 선발시험을 거친 5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멀리 헤이룽장 성(省)에서 30시간 넘도록 기차를 타고 온 학생도 있었고, 자기 성(省)에서 외무고시에 합격한 인재도 있었습니다. 저도 취재차 갔는데 중국 학생들이 써낸 답안지를 보고 입을 다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백일장 시제는 ‘소중한 인연’. 금상을 탄 톈진사범대학 3학년 정양(鄭楊·21)의 글은 좀 과장하면 아마추어 소설가 수준이었습니다. 정양은 “한국에 가보진 못했지만 도서관에서 매주 1권 정도 한국 수필과 소설을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게 잘 쓰는 비법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제1회 대회는 좀 초라했던 게 사실입니다. 대학으로부터 장학금 약속은 받아냈지만 전체 경비는 이 학장의 뜻에 공감하는 친구들이 십시일반 기부한 돈으로 충당했기 때문입니다. “보람있지만 과연 내년에도 대회를 치를 수 있을지….” 풀죽어 있던 이 학장은 그러나 중국 학생들을 가리키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저들을 보세요. 저 똑똑한 학생들이 언젠가는 중국을 이끄는 리더들이 될 겁니다. 한국어를 알고, 한국을 사랑하는 지도자 말입니다.”

이 학장은 당시 가수 인순이씨의 노래처럼 언젠가는 벽을 뛰어넘을 ‘거위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1회 중국 대학생 한글 백일장 기사가 보도된 뒤 많은 게 변했습니다. 적지 않은 후원도 답지했습니다. “만날 미국만 바라보지 말고, 한국이 좋다는 우리 주변국의 똑똑한 대학생들도 좀 챙기자”는 반성론도 나왔습니다. 제1회 대회 수상자 두 명이 전액 장학금을 받고 성균관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중국 대학들의 한국어과에선 ‘백일장 보고 대학원 가자’는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고 합니다.

중앙일보와 성균관대가 함께 만든 ‘21세기 한글 백일장 위원회’는 올해는 더 바빴습니다. 중국에서 2회 대회를 열었고, 몽골과 카자흐스탄에서도 한글 백일장을 열었습니다.

지난 10월 몽골에 가보니 1990년 한·몽 수교 당시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면서 친형제처럼 좋아하던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백일장에 참석한 몽골 대학생과 교수들은 “우리가 한·몽 친선의 다리가 되겠다”며 한국에서 온 손님들의 힘을 북돋워줬습니다.

12월에 카지흐스탄에서 열린 백일장에선 머리가 노랗고 눈은 파란 고려인 4세가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한글을 배운다고 말해 시상식장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한글 백일장에 입상한 각 나라의 학생을 모두 한국에 초청해 성대한 한글 콘퍼런스를 여는 게 백일장 위원회의 또 다른 ‘거위의 꿈’입니다.

2009년이 불과 나흘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이 작은 성공 스토리를 길게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누군가의 집념과 노력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이 학장처럼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그의 꿈대로 언젠가는 한국어를 아는 대통령, 한국을 사랑하는 영부인이 중국에서, 몽골에서, 카자흐스탄에서 나오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둘째, 시야를 넓히며 살자는 겁니다. 영어만, 미국만 바라볼 게 아니라 대한민국을 경이와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웃 나라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깨닫고 그들에게도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자는 겁니다. 남의 손은 매정하게 뿌리치면서 누가 내 손 안 잡아 준다고 투정만 하는 건 어리석을 테니까요.

김종혁 문화·스포츠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