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말년의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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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임기 말년이었던 92년,밤9시 TV 뉴스마다 그가 오찬은 누구와 하고 만찬은 누구와 했다는 뉴스같지 않은 뉴스가 매일 보도됐다.제발 대통령의 먹는 사진을 이제는 그만 비치라는 원성이 나올 정도였다.盧전대통령

을 가까이서 모셨던 한 인사는 당시 이를 대통령의 말년병(末年病)이라고 했다.이제 눈 앞에 닥친 퇴임을 생각해 그동안 냉대하거나 소홀히했던 친구.친척.지인등을 의식적으로 불러모아 파티를 열었다는 것이다.

헛된 퇴임후 영향력 시도

이정도는 애교가 있다.단임(單任)을 약속했던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임기말을 앞두고 내각제 개헌을 띄우다가 마침내는 대통령간선제를 유지하는 4.13 호헌(護憲)조치를 내렸다.결국 6월항쟁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직선제 개헌으로 돌아는

섰으나 임기 마지막까지 퇴임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그는 임기를 한달쯤 남겨놓은 기자회견에서“권력이란 그 자리에 앉는 것보다 내놓는 것이 더 어려워 몇배의 용기가 필요하다”면서 단임을 포기하고 집권연장을 유혹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밝힌 적이 있다.그런 말까지 해놓고도 그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퇴임대통령이 상왕(上王) 노릇을 할 수 있는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었다.그러나 결과는 백담사(百潭寺)행이었다.

권력에는 친구도 소용없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盧대통령은 퇴임후를 돈에 의지하려 했다.비자금사건 공판을 보면 그는 취임초부터 돈을 좋아했으나 말년이 가까워지면서 그 도(度)가 극심해졌다.그는“퇴임후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비자금을 남겼다”고 설명했다.퇴임후의 영향력을 권력이 아닌 돈으로 행사할 계산이었다.그 결과 역시 감옥행이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역시 올해초 기자회견에서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 지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다음 정부에도 일정 지분을 갖겠다는 의사표시였을 것이다.그러나 한보사건이 터지면서 金대통령의 말년은 지금 감옥에

가 있는 앞의 두 전직대통령보다 더욱 갑갑하게 됐다.퇴임후 영향력은 고사하고 임기를 제대로 잘 마무리하고 갈 수 있겠느냐는 정도로 어려워졌다.

金대통령은 남은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두 전대통령보다 더 클 것이다.우선 당장 한보사태를 잘 넘겨 불명예를 면하고 가능하다면 후일도 기약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까 모색하는 일일 것이다.여야 영수회담도 이러한

탐색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요즘 거론되고 있는 내각제 문제,황장엽(黃長燁)리스트,남북카드등도 그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자신은 그런 생각이 없다 해도 그러한 카드의 사용을 유혹하는 세력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누가 되면 퇴임후를 보장해주고 어느 정파가 뒷심이 되주고 하는 식의 약속은 권력이 바뀌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金대통령 자신이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다른 가능성은 대통령이 아예 자포자기에 빠지는 경우다.그를 최근에 면담한 인사들은 대통령이 매우 상심해 있음을 전하고 있다.요즈음은 신문.방송도 보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얼마 전까지만도 밤에도 주요 수석비서관들을 자주 찾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끝까지 직분.책임 다해야

이런 와중에 일부에서는 탄핵이 어떻고 사임이 어떻고 하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대통령이 중심을 잃을 때 닥칠 국가적 위험은 상상할 수도 없다.헌정의 중단을 위협하는 사회적 불안,돌발사태등에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지금 나라가 방향없이 떠내려가는 마당에 이런 일까지 벌어질 경우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金대통령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분명하다.퇴임후가 어떻고,국면전환 카드가 어떻고,체면을 살리는 방안이 무어고 하는 식의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특히 자식문제는 물론 자신에게까지 가혹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잘못

이 있다면 전직대통령이 구속됐듯이 임기후 사법적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이런 결심후에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직분과 책임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그것은 이 시점에서 최소한 헌정질서의 유지와 공정한 대선관리를 하는

것이다.이런 말년을 보낸다면 퇴임후의 문제는 국민이 판단해줄 것이다. 문창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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