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열달을 잘 넘기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최근 YS를 만난 사람들이 전하는 얘기로는 YS의 기(氣)가 매우 떨어졌다고 한다.대통령이 저런 상태로 남은 열달을 어떻게 보낼지 나라가 걱정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제와서 YS로서는 국민을 볼 체면도 없겠지만 권력행사의 바탕이 되는 권위나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으니 기가 꺾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가령 아들 현철(賢哲)씨가 정말 한보 외압(外壓)의 몸통으로 드러나거나 다른 비

리로라도 구속된다면 더더욱 대통령직 수행이 어려워질 것이다.그렇지 않아도 이미 한보사건에서 세사람이나 전수석비서관 이름이 나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YS의 권위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세명의 수석비서관이 관련된 일이라면 객관적 사실여부

를 떠나 대통령 역시 무관할 수 없다는 생각을 누구나 갖게 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벌써 극소수이긴 하지만 일부에서는 퇴진 요구가 나오고 여당안에서까지 이른바 헌정중단을 우려하는 소리가 나온다.대통령의 유고(有故)나 궐위에 대한 헌법규정이 있는 만큼 헌정'중단'이란 표현은 적절치 못하지만 만

일 임기도중 대통령이 물러나는 헌정변칙 상황이 온다면 국가혼란과 위기를 초래하는 중대사태가 아닐 수 없다.경제난국에 그런 사태까지 겹치면 그야말로 심각한 위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YS의 위기는 검찰수사의 진행과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한보와 현철 양대(兩大)게이트에 대한 검찰수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될수록 YS의 위기도 깊어지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양대 게이트의 철저한 규명이 없다면 그 역시 위기를 몰고 올 것도 틀림없는 일이다.검찰이 다시 눈치수사.면죄부수사를 벌인다면 이 나라 법치가 무너지고 우리사회에 광범위한'신뢰의 위기'가 올 것이다.그럴 경?분노에 찬 항의 시위가 거리를 덮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얼마전 중소기업 사장이 주머니를 털어 검찰규탄광고를 낸 일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때 우리는 지금 아슬아슬한 벼랑에 서 있는 것과 다름없다.자칫 잘못하면 굴러 떨어질 판이다.양대 게이트를 철저히 규명하면서도 정상적인 헌정유지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서로 충돌하기 쉬운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벼랑에서 안전을 유지하는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균형을 잡는 것이다.균형을 잃어버리면 추락한다.균형을 유지하면서 남은 10개월을 무사히 넘겨야 하는 것이다.균형을 잃지 않자면 누구도 무리나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이런 민감한

상황에서는 작은 실수도 자칫 균형을 깰 수가 있다.

우선 수사와 병행해 우리가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은 국정의 정상화.경제살리기 노력이다.철저한 수사는 불가피하게 청와대를 무력케 하고,경제부처와 금융권을 뒤흔들게 마련이다.그럴수록 우리는 국정의 중심을 잡아야 하고 할 일을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수사만 있고 이런 노력이 없으면 균형이 무너져 벼랑에서 떨어질 위험성이 크다.대통령의 기와 상관없이 국정은 굴러가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YS 본인의 역할이 중요하다.마음을 비워야 한다.더이상 권력과 명예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항간에선 내각제카드니 황장엽(黃長燁)리스트니 하는 것으로 국면전환을 꾀하리라는 관측도 있지만 불가능한 일이다.해봐야 안될게 뻔하

다.국정의 중심을 내각에 맡기고 경제살리기도 경제팀을 중심으로 한 내각에 맡겨야 한다.더이상 민주계를 챙기거나 대선후보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도 않는게 좋을 것이다.물론 수사에 영향을 미칠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아들 문제도 수사

결과에 조용히 맡기는 수밖에 없다.위기상황의 핵심이 YS인 만큼 더이상 YS쪽에서 무리나 실수가 나와선 안된다.

야당도 균형유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이번 총재회담에서 보인 것처럼 양대 게이트 외에 경제살리기를 정치의 다른 주요 의제로 설정해야 한다.게이트 규명만이 전부인 것처럼 체중을 그쪽에만 실으면 균형이 무너질 우려가 있다.게이트와 경제

로 균형을 잡는게 필요하다.근로자.학생.시민도 이런 시기엔 성숙된 판단이 있어야 한다.

이제 YS가 밉다,곱다 할 단계는 지난 것같다.흔들어 봐야 버틸 힘도 있는 것같지 않다.흔드는 것도 상대가 버티고 힘을 쓸 때라야 흔드는 것이다.

지금은 비상시다.비상시엔 비상시가 요구하는 행동과 결단이 필요하다.우리는 자제와 냉철한 이성으로 벼랑위의 이 상황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남은 열달을 무사히,잘 통과해야 한다. (송진혁 논설실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