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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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비는 거의 그쳤으나 날이 저물어 주변에는 아무도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관광객들도 이제 서둘러 미스터리 역으로 물러갈 시각이었다.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나서'피난자들의 정원'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쪼그려 엎드린 채 죽어 있는

소녀로 보이는 시신의 머리 근처에 머리를 대고 누워본다.이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죽어갔을까.'소녀와 죽음'이라는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가 어디선가 흘러오는 것 같다.

나에게도 석고를 부어 열네 구의 시신이 되게 하라.

나는 이곳의 열세 구의 시신들처럼 벌거벗긴 내 죽음,혹은 주검을 영원히 전시하고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등신불을 만들 듯이 사람들마다 죽는 즉시로 석고를 부어 통째로 데드보디를 만든다면 무덤과 비석을 세우는 대신 그 석고

상을 무덤과 비석으로 삼는다면.

하지만 이것은 나의 상상일 뿐,피난자들의 정원은 철망이 쳐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이렇게 철망을 쳐두지 않았으면 석고 시신들은 벌써 부서져 망가지고 말았을 것이다.

건너편 큰길을 따라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달려간다.죽음에 대한 나의 명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이탈리아 소매치기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빽치기를 한다는데.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녀석도 소매치기인지

모른다.

나는 배낭을 추스르며 피난자들의 정원을 벗어나 방금 오토바이가 치달려간 큰길가 인도로 올라선다.여기서 미스터리 역까지 걸어가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왜 폼페이 역이 아니고 미스터리 역인가 폼페이에는 60개의 크고 작은 방으로

이루어진 대저택인'미스터리의 집'이 있다.이 집만 구경하는 데도 한나절이 족히 걸릴 것이다.미스터리의 집은 내일 다시 와서 구경해야 할 것 같다.

너희들에게는 이집트로 가서 다시 편지 띄우마.나 혼자만 좋은 구경하고 돌아다녀서 미안하구나….

“좋은 구경? 시체들을 구경하고 다니는 것도 좋은 구경인가? 그럼 우리도 좋은 구경 했게?”

도철이 편지를 다 읽고나서 관을 흘끗 쳐다보았다.

“우리 저 관 치워버릴까? 그 명복 장의사인가 하는 데 도로 갖다 놓을까?”

기달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입단식할 때 써먹겠다고 가져왔잖아.관 속에 하룻밤 누워 자야 우리 단원이 될 수 있다며? 그래서 옥정이도 벌거벗고 그 속에 들어갔잖아.옥정이 아버지도 들어갔다 나왔으니 죽어서 우리 니키 마우마우단원이 되었겠다.히히.”

용태가 히죽 웃다가 굳어져 있는 단원들의 얼굴을 보고 얼른 웃음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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