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포커스>한보로 멈춘 경제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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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경제는 유통이다.”한보 정태수(鄭泰守)총회장 못지않게 지난 80년대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영자(張玲子)씨가 남긴 말이다.張씨는 돈이 돌아야 경제가 돈다는 문리를 체험으로 터득했던 것일까.

한보게이트 속편이 나라를 뒤흔들면서 張씨의 말이 다시 생각난다.한보가 부도를 낸지 두달이 지나는 동안 우리 경제는 멈춰버린 시계같은 꼴이다.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는 양상이다.

돌지 않는 경제의 중심에는 금융이 있다.금리와 환율이 치솟고 부도로 쓰러지는 기업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까닭이 멈춰버린 금융에 있다는 것이다.

돈이 왜 돌지 않을까.이유는 간단하다.금융기관들이 얼어붙은 때문이다.한보 부도 이후 금융기관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여신이 묶이고 이자수입이 줄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눈에 보이지 않는 손실이 더 컸다.

신용도가 곤두박질치고,은행원 명함을 내밀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체면도 구겼다.그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책임추궁이었다.수 많은 뱅커들이 쇠고랑을 차거나 중징계를 받았다.규정을 제대로 안 지키거나,담보를 철저히 챙기지 않았다는게 이유였

다.

한보 재수사를 시작한 검찰은 한술 더 떠 뇌물을 안 받았더라도 규정을 안 지키거나 담보 없이 대출해준 행위를'업무상 배임'으로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그러나 한번 냉정히 따져보자.한보 아니라 어느 기업으로부터라도

은행원이 돈을 받고 대출해줬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하지만 담보가 없다고 배임으로 몬다는 것은 금융의 원리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다.

담보만 챙겨서 돈을 빌려준다면 은행이 전당포와 다를 게 없다.고객의 신용과 장래성등을 따져서 유망하다 싶으면 돈을 대주는 것이 은행의 역할이다.

아직도 수 많은 기업들이 담보가 없어 은행돈을 못쓰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신용대출을 장려해야 할 상황이다.그러나 지금 이런 경제논리는 검찰과 정치권의 칼날 앞에 맥을 못추고 있다.대신 돈이 돌지 않고 있다.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판에 신용 믿고 돈 내줄 은행원은 많지 않다.

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떠들기만 할게 아니라 왜 돈이 안 도는지 그 이유를 곰곰히 따져봐야 할 시점이다. <손병수 경제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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