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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통화 놓고 유로.위안화 도전... 급격한 추락은 없을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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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20면

지난주 뉴욕·런던 외환시장에선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달러로부터 탈출(Escape from US Dollar)’ 현상이었다. 외환시장 참여자들은 경쟁적으로 달러를 팔아 치우기 바빴다. 달러가치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ICE 달러지수’(미국 금융회사 ICE가 만든 지수)는 78 선까지 밀렸다. 지난주에만 2% 남짓 하락했다. 원화에 대한 달러가치도 급락했다. 12일 1455원이던 환율은 주말에 1200원대로 떨어졌다. 미 중앙은행이 명목금리를 사실상 0%로 낮추겠다고 결정한 뒤였다.

하드파워<2> 달러 헤게모니

달러가치는 미 경제력의 상징이다. 달러가치가 흔들리자 그동안 잠잠했던 ‘달러 헤게모니(패권) 종언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세계경제의 몰락(달러의 위기)'을 쓴 리처드 덩컨, ‘달러 헤게모니’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헨리 리우 뉴욕 타임스 객원 칼럼니스트 등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금융위기의 진앙인데도 달러가치가 치솟은 역설적 상황이 끝나 가고 있다”며 “이제는 미 경제의 부실이 달러가치에 반영돼 달러 패권이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2조 달러의 외환을 보유한 중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지난주 중국 정부 싱크탱크의 관계자들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드러내 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장위옌(張宇燕)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연구소 소장은 “위안화를 국제결제 통화로 만들겠다는 중국의 입장은 확고하다”고 말했다. 중국 내수시장을 유인책으로 삼아 달러화 대신 위안화로 무역대금을 결제하도록 한다는 전략이다. 중국은 이미 벨로루시·러시아와 ‘위안화 대금 결제’에 합의했다. 홍콩·대만과도 협의 중이다. 한국 기업에 대해서도 물밑에서 타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미 달러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 번째 헤게모니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한다. 1차·2차대전을 거치며 세계 최강의 생산력을 갖게 된 미국은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1944년 완성된 달러 헤게모니는 71년 금태환 중단(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80년대 일본 경제의 급부상으로 두 차례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만만치 않다. 유럽연합(EU)의 통합화폐인 유로(Euro)화와 새로운 경제대국인 중국 위안화가 버티고 있는 현실에서 미국의 실물경제와 금융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90년대 글로벌 스탠더드로 통하던 미국식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다.

60여 년간 계속된 달러 헤게모니가 마침내 막을 내리는 것일까.
리처드 하우스먼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에서 “기축통화인 달러화 지위가 어느 날 갑자기 추락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근거 중 하나는 금융시장 참여자들의 관성(Inertia)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해 쌓은 익숙함과 편리함 때문에 기축통화를 바탕으로 한 거래를 쉽게 중단하지 않으려 해 한번 기축통화로 자리 잡은 돈은 발행 국가의 경제력이 약화한 뒤에도 상당 기간 패권적 지위를 구가한다는 것이다.

19세기 기축통화였던 영국 파운드화가 전형적 예다. 영국의 산업생산력은 1880년 이후 독일에, 1900년 이후 미국에 뒤졌다. 하지만 파운드 패권은 브레턴우즈 체제가 수립된 44년까지 유지됐다. 마찬가지로 중국 위안화가 최근 달러화 지위에 도전하고 있지만, 80년대 엔화처럼 무역대금 결제통화의 지위를 일부 빼앗는 데 그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이뤄지는 하루 외환거래액 가운데 무역결제 거래 규모는 20% 남짓이다.
그렇다고 달러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우스먼 등도 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 중단 이후 달러 지위가 서서히 약해지는 추세라는 점을 인정한다. 90년대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지고 미 경제가 부활하면서 달러 패권이 복원됐지만, 그런 대세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라고 본다.

전문가들은 통화와 군사력 패권이 비슷한 시기에 막을 내린 역사의 흐름에 주목한다. 세계적 금융통화 이론가인 찰스 굿하트 런던정경대 교수는 “그리스나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칭기즈칸 제국, 영국 등의 통화 패권은 경제력이 아니라 군사력의 몰락 시기와 비슷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달러 패권의 종말은 미군의 힘이 최강 자리에서 밀려날 때나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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