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받는 美 패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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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20면

“미국의 제국주의는 이제 거의 그 길의 끝에 도달하고 있다.” 미국에 적대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9월 말 유엔 총회장에서 한 말이다. 그가 툭하면 던지는 미국에 대한 독설이다.아마디네자드뿐만이 아니다. 최악의 금융위기로 미국이 휘청대면서 ‘수퍼파워’ 미국의 쇠퇴를 전망하는 담론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유일 수퍼파워 지고 다극체제 떠오른다

1987년 ‘블랙 먼데이’ 당시 뉴욕 증시의 주가가 단번에 20%나 폭락한 뒤 ‘묵시록’적 담론이 무성하던 수준을 넘어선다. 존 그레이 런던정경대 교수는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무릎을 꿇는 동안 중국인들이 우주 유영을 했다. 얼마나 상징적인가”라고 했다. 폴슨이 9월 25일 펠로시에게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법안 통과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애원한 것을 빗댄 얘기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도 지난달 미국 내 16개 정보기관의 정보를 취합해 만든 ‘글로벌 트렌드 2025 전망 보고서’에서 “미국이 홀로 국제질서를 끌고 나가는 시대는 끝났다”며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는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보고서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를 충분히 반영할 수 없는 시점에 만들어졌다. 이 보고서가 나오자 중국의 일부 언론은 “미 정보기관이 2025년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경제력을 갖추고, 미국·중국·인도의 ‘삼국 정립’ 시대가 올 것이라 예고했다”고 흥분했다.

11월 15일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금융정상회의는 미국 또는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말해 주는 사건이었다.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신흥 경제대국들의 높아진 위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장이었다”며 “미국이 상당 기간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지만 국제 질서는 다극(multipolar)체제로 운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극 체제를 넘어서서 어느 나라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극체제(nonpolarity)가 올 수도 있다”(리처드 하스 미 외교관계협의회 회장)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을 선언한 9월 15일 미 시카고 상업거래소에서 중개인들이 폭락하는 각종 지수들을 보며 허탈해하고 있다.시카고 로이터=연합뉴스

국제 무대에서 미국이 힘을 상실하고 있다는 징후는 뚜렷하다. 그레이 교수는 “지난여름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침공했을 때 미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관자로 있어야 했다”며 “이는 과도한 군비 지출로 인한 재정난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새뮤얼 버거는 미국의 침몰과 중국의 부상을 동티모르에서 찾았다.

그는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선 중국이 건설해준 대통령궁 건물이 빛나고, 중국이 제공한 유니폼을 입은 군인들이 넘쳐난다”며 “소프트파워를 통한 영향력 확대를 소홀히 한 미국이 지역 패권 경쟁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전략적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21세기 들어 미국이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몰입하는 사이 중국은 에너지·자원 확보와 국가전략 차원에서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집중 공략했다. 지난 10년간 아세안에 대한 지원·투자는 연 20%씩 증가했고, 북아프리카에선 이 지역 전체 지원액 15억 달러 가운데 9억 달러를 중국이 댔다.

“미국은 여전히 강하다”는 전문가들 중에는 미국의 위기가 미국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부시 행정부 8년의 문제’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버거 전 보좌관이나 그레이 교수의 지적처럼 부시 행정부가 소프트파워를 강화하지 않은 채 군사력 위주로 국제 질서를 끌고 나가다 도덕성까지 상처를 입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영국 정부의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의 로빈 니블렛 박사는 “미국의 복원력은 대단히 강하다”고 말했다.

뉴스위크지 편집장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지난여름 출간한 '미국 힘의 미래'란 책에서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회고록을 인용했다. 1897년 6월 런던 거리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 퍼레이드를 지켜보던 여덟 살의 토인비는 “태양은 하늘 한복판에 정지돼 있고, 우리는 세계 정상에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자카리아는 “영원할 것 같던 대영제국은 2년 뒤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보어전쟁을 계기로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퍼파워 미국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많은 학자는 미국의 군사력이나 세계를 장악한 소프트파워를 감안할 때 미국의 주도적 위치를 위협할 나라는 당분간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EU나 중국·인도가 미국을 대체할 정도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덟 살 토인비’처럼 전 세계가 패권 질서의 이동이라는 태풍 속에 서있는 게 아닌지 누가 장담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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