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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사립대 총장가면 ‘갑-을 관계’ 뒤바뀌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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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04면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맨 오른쪽)이 9일 서울 종로구 4·19 혁명 기념회관을 찾아가 ‘4·19 혁명’을 ‘데모’로 표현한 동영상을 배포한 것에 대해 사과한 뒤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박윤석 4·19 민주혁명회 회장(가운데)이 안 장관을 외면한 채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한겨례신문 제공

“장관은 나그네요, 나그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교육 파트에서 활동했던 한 교수는 최근 기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교육과학부의 주인은 관료이고 장관은 손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관료들에 휘둘리는 교육부 장관, 왜

왜 그럴까.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교육수장의 평균 재임 기간은 9개월. 평균수명이 가장 짧은 중앙부처 중의 하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당시 “교육부 장관만큼은 나와 임기를 같이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에서도 장관 임기는 10개월에 불과했다. 김대중 정부에선 8개월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단명한 장관들은 대개 낙마 후 대학 총·학장이나 교육부 산하 기관에 둥지를 튼다.
김도연 전 장관은 지난 8월 퇴임한 뒤 한 달 만에 울산대 총장에 취임했다. 과거 정부에서도 이상주 전 장관이 퇴임 후 성신여대 총장, 한완상 전 장관과 김덕중 전 장관이 각각 한성대·아주대 총장이 됐다. 윤덕홍 전 장관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으로 취임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하 관계가 역전돼 과거의 부하 직원들에게 감독을 받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퇴임 후 서로의 처지가 바뀌는 상황에서 장관들이 관료를 장악하기란 쉽지 않다.

청와대 관계자는 “장관이 두렵지 않은 상황에서 복지부동이나 무사안일 풍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했다. 그는 “교육 관료들은 장관이 지시를 해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민감한 문제는 아예 회피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좌편향 역사교과서 개편 문제를 놓고 한 방송사가 주최한 토론회에는 교육부 고위 간부들이 출연을 서로 미루는 바람에 과장급 공무원(4급)이 토론자로 나설 뻔했다가 토론 직전에야 가까스로 국장급을 찾았다고 한다.

장관도 통제하기 어려운 교육 관료들은 ‘교육부-각종 교원단체-사립대’로 이어지는 공고한 관료 네트워크를 형성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있다. 일부 교육부 관료들의 ‘장관 흔들기’가 가능한 이유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 차관을 역임한 10명의 퇴임 후 경력을 분석한 결과 9명이 대학 총장이나 학장, 교과부 산하 공단 또는 대한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옮겨 간 것으로 나타났다. 9명 중 4명은 퇴임하자마자 총장이나 학장으로 영입됐다. 이기우 전 차관은 교육부를 떠난 지 6년 만에 차관이 됐다가 이해찬 전 총리의 3·1절 골프 회동과 관련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2006년 3월 불명예스럽게 사퇴했지만 넉 달 만에 재능대 학장으로 영입됐다. 교육부가 학생선발 정원 등 대학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보니 사립대들이 물의를 빚은 교육부 인사라도 ‘모셔가듯’ 하는 것이다.

1급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3월 인사 때 사표를 던진 1급 교육 관료들 중 교육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을 지낸 박경재 서울시교육청 부교육감이 얼마 전 동우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사학재단을 운영했던 신진수 전 의원의 설명이다.
“교육계의 전관예우는 법조계조차 따라올 수 없어요. 관료들은 앉을 자리를 자기가 만들어서 옵니다. 사립대 입장에선 그들을 안 쓸 수가 없어요. 장·차관은 물론 사무관(5급)이라고 해도 교육 관료라면 학교에 도움이 되니까 영입하게 됩니다. 일부 대학의 관료 출신 교수 가운데는 강의 없이 보직만 맡은 사람도 많아요. 퇴임해도 갈 곳이 있는데 관료들이 무리해서 일을 하려 하겠습니까.”

청와대는 이런 분위기 속에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사항이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확정한 교육개혁 정책이 속도를 내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본지가 입수한 정부기관 문건(‘교과부 고위 공무원 인적 쇄신 배경 및 사례’)에는 교육부 관료들에 의해 표류하는 교육정책들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다. 지역 부교육감을 교과부 고위 공무원으로 발령하는 것은 좋지 않은 관행으로 폐지하겠다고 했지만 흐지부지됐고 올해 12월 학교정보공개를 시행했지만 정작 학력정보 공개는 2010년으로 연기됐다고 지적한다. 또 영어전용교사 제도나 영어능력 시험은 현장 반대 여론을 내세워 유보됐고 대학자율화(3불정책 폐지)를 공약했으나 2012년으로 미뤄졌다고 한다.

지역 교육청 부교육감 순환보직제와 관련, 한국교총 이원희 회장은 “문제가 생기거나 보직이 부족하면 부교육감이나 국립대 사무국장으로 잠시 나가 있다가 돌아온다. 일제 잔재가 아직 남아 있다.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관료 출신인 김진표 전 장관(현 민주당 의원)은 이렇게 재직 시절을 요약한 적이 있다.

“공무원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는데도 소식이 없어 세 차례 같은 지시를 내리고 나니 그만 물러날 때가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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