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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풍자 허용않는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어릴적 우리 동네에 살던 한 할머니는 TV드라마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해 이웃들에게 웃음을 안겨주곤 했다.겹치기 출연하는 남자탤런트가 여기에서는 바람을 피우다 저기에선 애처가로 나오면“저 나쁜 놈,엉큼하기도 하지”라고 대놓고 욕을

하기도 했고,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묻는 바람에 며느리가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최근 개봉된 코미디영화'똑바로 살아라'는 제작진이 세무(稅務)비리를 소재로 해 부조리가 판치는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겠다고 밝혔던 작품이다.하지만 정작 완성된 영화에서'세무비리'는 실종됐다.이쯤 얘기하면 눈치빠른 사람들은 벌써 전후사정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영화계에 떠도는 소문은 이렇다.비리를 일삼는 세무공무원이 등장하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보도가 나가자 국세청이 영화사에 세무조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이다.이미 절반정도 분량이 촬영을 마친 상태였지만 영화사는 이를 모두 버리고

전면 개작에 들어갔다.그 바람에 날아간 돈이 수억원.

영화사측의'설명'은“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어서”다.구청 세무과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찍다 보니 활력이 모자랐다는 것이다.하지만 원래 액션보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대사 코미디를 의도했던 작품이다.폐기한 부분에는 세무과를

찾아온 민간인이 직원에게“새로 나온 책인데 한번 읽어보시라”며 고전명작'노인과 바다'를 건네는 장면(책속에는 봉투가 들어있다),“계좌번호 안바뀌었죠?”라고 확인하는 장면등이 들어있었다.

주인공도 바뀌었다.고위공직자의 실명화되지 않은 재산을 등쳐먹는 사기꾼에게 정보를 넘겨주는 두사람의 세무과 직원이 정보 브로커와 컴퓨터 해커라는 단순 사기범으로 둔갑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앞뒤가 안맞고 예정에도 없던 위장 살인극이 벌어지는등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경직된 현실이 허구의 세계까지 감시하고 지배하는 이런 예는 숱하게 찾을 수 있다.

특정 집단의 이야기를 다루려는 영화가 그 집단의 거센 반발로 제작이 취소된 사례는 이전에도 꽤 있었고,얼마전에는 TV의 정치풍자 코너가 외압 때문에 중요 대목이 잘려나가고 방향도 전환됐다는 의혹을 샀다.

우리는 아직도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는'동네 할머니'의 순진한 세계에 갇혀있는 것일까.아니면'지어낸 이야기'가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일까.풍자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수준높은 예술을 기대할 순 없다.허구의 세계에는 성역(聖域)이 있을 수 없거늘….

<이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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