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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아버지가 부럽다? - 父權몰락 세태속에서 짚어본 당당한 위쪽 남자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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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고개숙인 아버지’‘아버지 부재(不在)’―언제부턴가 ‘아버지’라는 단어엔 ‘신드롬’(증후군)이라는 꼬리가 따라 다닌다.아버지는 집안에서 더 이상 든든한 기둥이 아니라느니,설 땅을 잃은 그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느니, 갖가지 ‘아버지론’의 목소리가 높다. 잃어버린 아버지?

하지만 북한에는 그 아버지가 살아 있다.서울대 생활과학대 이기춘(55)교수팀이 찾아낸 것이다.그들은 북한 생활문화연구를 위해 최근 2~3년간 월남한 귀순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北)에는 아직도 아버지가 건재함을 알아냈다. 그들은 놀랐다.가뜩이나 남녀평등을 금과옥조로 삼는 사회주의 북한 아닌가.

귀순여성의 증언.“식량난이 가중되면서 쌀밥이 매우 귀해졌지요.강냉이등을 섞어 밥을 지은 후 남편에게는 쌀이 많은 부분만 퍼드립니다.애들과 저는 옥수수가 많아 푸석푸석해진 밥만 먹습니다.”

요즘의 우리 사회라면 아이들 몫이 우선이다.중년을 지난 경우라면 설사 부인이 권한다 해도 “당신과 애들이나 먼저 먹구려”하며 한번쯤 사양하는게 이곳의 남편들이다.젊은 부부라면 사정은 더할테고….아무 거리낌없이 기름진 밥을 차지하는 북한 아버지의 ‘권위’가 이들에겐 ‘횡포’로 비칠지도 모른다.

“가사노동은 철저히 여자 몫입니다.근로여성이라 해도 남편이 집안 일을 도와주는 경우는 거의 없죠.연탄 찍어주는게(북한에서는 연탄가루를 배급받아 각 가정에서 만들어 쓴다) 유일하게 남자가 돕는 일이지요.”

이런 태도 역시 우리라면 ‘게으른 남편’으로 지탄받기 십상이다.

다시 귀순자의 얘기.“집안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 철저하게 가장의 의견이 존중되지요.귀순 역시 대부분 남편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뜻밖의 얘기를 들은 가족들은 처음엔 갈피를 잡지 못해 어쩔줄 몰라합니다.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장의 결심을 신뢰하고 마음을 바꿉니다.”

북한에서의 아버지 권위를 전근대적 사고의 일단으로만 단정지을 수 없는 대목이다.어떤 남편은 가족들에게 일언반구도 없다가 거사 당일 갑자기 탈북계획을 툭 던졌다.이 한마디에 젖먹이까지 업고 따라나서게한 것은 집안기둥에 대한 믿음과 신뢰였다. 사실 북한에선 전통적 가족관념과 사유재산제도가 양대 청산과제 아니었던가.지난 92년 개정된 북한 헌법 제76조를 보자.

‘녀자는 남자와 똑같은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지닌다.국가는 산전산후 휴가의 보장. 여러 어린이를 가진 어머니를 위한 로동시간의 단축,산원·탁아소와 유치원 망의 확장,그밖의 시책을 통하여 어머니와 어린이를 특별히 보호한다.국가는 녀성들이 사회에 진출할 온갖 조건을 지어준다.’

남녀평등을 명시한 이 문구는 북한의 여성이 가정에서 남한의 주부보다 훨씬 강한 발언권을 가질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하지만 실제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연구팀은 그 답을 폐쇄적인 북한사회의 속성에서 찾고 있다.가부장적 관습을 변화시키기에는 외부세계와 너무 단절됐다는 것이다.그럴만도 하다.하지만 ‘외부와의 차단’만으로는 또 하나의 전통가치인 고부관계의 변화를 설명하기에 역부족이다.

북한에서도 큰아들이 부모를 모시는 것이 보편화돼 있는데 50대 이상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나이 어린 며느리일수록 할 말은 하고마는 당찬 모습을 보인다는 것.그러나 가장의 권위만큼은 세대를 불문하고 확고하다는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경제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큰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팀장인 이기춘 교수의 이 진단은 논란의 소지를 남긴다.북한주부 절반정도가 직업을 갖고 벌이에 나서 가정경제에 대한 외형적 기여도를 무시하기 어렵다.하지만 여성의 보수는 남성보다 현저히 낮다.법규상 남녀간 임금차이를 둘 수 없지만 교원이나 의사등 여자가 주로 종사하는 직업의 임금이 낮게 책정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아버지들은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이교수의 이 지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사회주의 노동법 제33조에 따라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8시간 학습하는’ 북한에서는 학습시간과 쉬는 시간 대부분을 가족들이 함께 지낸다.자연스럽게 오가는 대화속에서 식구들의 정이 쌓이고 가장의 권위도 확고해진다는 얘기다.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시장의 원리를 기본축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전통과 위계,다시 말해 과거 ‘견고한 것들’을 그냥 인정하지 않았다.그러다보니 실속없이 권위만 따지던 제반 제도·관습은 힘없이 허물어졌다.결국 우리시대 ‘아버지 몰락’을 상품화의 실패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반대로 북한의 아버지는 덜 상품화된 단계에서 생긴 부산물쯤 되는 셈이다.

“우리사회의 ‘아버지 부재’를 단순히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으로만 바라볼 수 없음을 말해주는거죠.” 연구팀의 최종 평가다.이는 남북한의 각기 다른 전통의 붕괴과정에서 아버지의 ‘있고 없음’이 결정된 것까지를 함축한다.이를 계기로 오늘의 우리 사회상을 뒤돌아 보면 어떨까.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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