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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보는 세상] 낯선 곳으로의 여행, 추억을 안고 돌아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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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바투타의 여행
원제 Traveling Man, 제임스 럼포드 글·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 38쪽, 1만2000원

할아버지의 긴 여행
원제 Grandfather’s Journey, 앨런 세이 글·그림
엄혜숙 옮김, 마루벌, 40쪽, 9000원

오리건의 여행
원제 Le voyage d’Oregon, 라스칼 지음
루스 조이 그림, 곽노경 옮김, 미래M&B, 34쪽, 9000원

영화 ‘반지의 제왕’의 영웅 프로도는 호빗족이다. 호빗은 모험심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종족이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낱말은 아마도 ‘안정’과 ‘안주’일 거다. 따라서 마을을 떠난 호빗은 거의 없다. 자기들의 세계에 안주하며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았다. 남들이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프로도는 호빗의 입장에서 보면 집안 내력을 조사해 봐야 할 정도로 수상쩍고 믿음이 가지 않는 호빗이다. ‘모험’을 택했으니까.

14세기 모로코 출신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호빗에겐 도저히 존경받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자그마치 30여 년에 걸친 긴 여행을 했다. 그의 여행기를 그림책으로 꾸민 것이 『이븐 바투타의 여행』이다.

늑대처럼 도사리고 있는 산적들과 병마와 싸우며 도착한 도시. 하지만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다. 외로움의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낯선 남자가 다가온다. 여행이란 여행자를 외롭게도 하지만 친구를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술탄을 만나고 반란자를 만나고 부자가 되었다가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가 하는 여정, 여행은 여행자에게 수백 개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여행자는 이야기꾼이 될 수밖에 없다. 마침내 돌아온 고향, 그토록 그리워한 고향인데 너무 낯설다. 여행은 수많은 낯선 곳을 고향처럼 느끼게도 해주지만 고향에 가면 이방인처럼 느끼게도 하는 것이다. 이븐 바투타는 또 여행길에 오른다. 그는 보물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여행자의 보물인 추억을 가져왔다. 책이 귀한 시대에 이븐 바투타는 이 추억들을 이야기로 엮어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눈을 열어 준다.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한편 『할아버지의 긴 여행』은 지은이 앨런 세이와 그의 할아버지에 얽힌 이야기다. 미국과 일본 두 나라를 오가며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처음으로 양복을 입고 기나긴 여행길에 오른 할아버지,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바닷길 끝에 만난 육지, 그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태평양처럼 끝없이 펼쳐진 넓은 벌판, 공장과 높다란 건물이 들어선 거대한 도시들, 여행하면서 만난 여러 사람들. 할아버지가 만난 미국은 경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여행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병이 있었으니 바로 향수병이다. 할아버지는 결국 귀향을 선택한다. 하지만 고향에서도 끊임없이 향수병에 시달린다. 이 나라에 있으면 저 나라가 그립고, 저 나라에 있으면 이 나라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주인공들이 여행을 떠났다. 세상을 구경하려고, 보물을 발견하려고, 또는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어찌하여 그리된 경우도 있다. 어찌됐든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또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돌아온다.

여행길에 나섰던 이들이 죄다 근사한 영웅이 되어 돌아오면 오죽이나 좋을까? 주인공이 되지 못한 등장인물들은 숨겨져 있던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공주를 얻기 위해, 또는 앓아누운 아버지를 위해 길을 나선 세 형제나 세 왕자를 생각해 보라. 첫째와 둘째는 자기들보다 먼저 목적을 이룬 셋째에 대한 질투에 눈이 멀어 추악하게 변한다.

『오리건의 여행』은 서커스단에서 재주를 부리는 난쟁이 듀크와 곰 오리건이 광대짓을 그만두고 오리건이 살만한 숲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야기다. 가는 길에 여러 도시를 지나고 산과 강을 지나며 흑인 트럭운전수, 떠돌이 장사꾼, 여배우가 될 거라는 수퍼마켓 종업원, 인디언 추장들을 만난다. 드디어 도착한 숲, 하지만 듀크는 오리건을 두고 떠나야 한다. 살에 붙어버려 영영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빨강코를 눈밭에 떨구어내고 가볍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맨 앞에 실린 프랑스의 시인 랭보의 시처럼.

‘상쾌한 여름 저녁이 되면 나는 들길을 가리라./ 보리 이삭에 찔리고, 가느다란 풀을 밟으며/꿈꾸듯이, 나는 발자국마다 신선함을 느끼리./불어오는 바람에 내 맨머리카락이 날리는 구나!//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사랑만이 솟아오르네./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방랑자처럼/자연 속으로, 연인과 가는 것처럼 행복하게.’

정병규(어린이책 전문서점 ‘동화나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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