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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화제작기행>'학교는 이래야 한다' 허시 주니어 著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주입식.암기식 수업을 탈피해 학생 중심의 교육을 추구해야 한다.”“추상화한 지식 대신 직접 체험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수업은 진도가 아니라 학생들 발전단계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단편지식보다 지식의 습득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명제들은 지난 수십년간 미국의 교육개혁 강령으로 채택돼 온 것들이다.입시위주 교육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부럽기 짝이 없는 개혁방향이다.

그런데 이 강령들을 정면으로 반대하며 철폐 내지 조정을 요구하는 책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E D 허시 주니어의'학교는 이래야 한다'(원제 The Schools We Need.Doubleday刊)가 바로 그 책.

단순히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적 주장을 담은 책이라면 그렇게 귀를 기울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저자는 진보주의 풍조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자신을'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실용주의자'일 뿐이라고 내세운다.그리고

진보주의 성향의 일부 교육사상가들도 그의 주장에 수긍하는 실정이다.진보적 개혁을 극단으로 끌고 가면 어떤 폐단이 생기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이다.흔히 재래식 교육은 주입식.암기식이라고 비판된다.그러나 저자는 민주사회 시민으로

서의 자질과 현대사회 일꾼으로서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주입식.암기식 교육의 높은 생산성도 꼭 필요하다고 반박한다.또 교육개혁안이 체험을 강조하지만 인류문명이 언어.문자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문자지식의 비중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학생 하나하나의 발전단계에 맞춰 교육을 베푼다는 발전단계론은 현실성 없는 이상론으로 본다.실제 현실교육에선 교사도 학생도 부진한 학업성취에 책임을 지지 않아 결국 교육수준의 저하를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단편지식보다 지식 습득방법을 내용으로 삼자는 주장도 형식주의라고 폄하한다.기초지식을 충분히 갖는 것이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얻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입장.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학생이라야 같은 주제에 관한 더 높은 수준의 글을 읽을 흥미도 느끼고 소화할 능력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자유방임적인 교육관행이 평등의 가치를 배반하고 있다는 지적이 특히 통렬하다.학교가 학생들의 지적 성장에 공헌하는 일이 약할수록 가정환경의 우열이 학생의 성취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공교육 기능의 쇠퇴가 교육의'부익부 빈익빈'을 부르는 현상은 사교육의 범람 속에 우리도 겪고 있는 문제다.교육은 근대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다.군국주의.사회주의 모두 이념을 위해 교육을 활용해 왔다.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교육

의 기능이 적극 발휘돼야 한다는 주장은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고비에서 우리도 음미할만하다.

이 책이 미국의 교육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교육개혁의 과제를 앞둔 우리로서는 우리교육의 중요한 모델이 된 미국교육의 전철(前轍)을 살피는데 긴요한 참고가 된다.“정치는 이념에 따르더라도 교육은 현실적 기능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특히 귓가에 남는다.

<저자>

허시 교수는 미국 버지니아대 영어학 교수.

19세기 문학을 연구하던 그가 교육개혁 논쟁에 뛰어들어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지난 87년'문화해득력'(원제 Cultural Literacy)을 내면서다.

그 책에서 미국교육이 지나치게 진보 개혁으로 치우치다보니 알맹이를 잃어버리게 됐다고 비판한 저자는 그후'핵심지식재단'(Core Knowledge Foundation)을 세워 '알맹이'회복을 위한 교육운동을 벌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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