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영화사 미국영화 수입자제 움직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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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대기업 영화사들이'드디어'정신을 차렸나? 수지타산이 애초부터 불가능할 정도의 고가로 미국영화를 들여오던 대기업들이 몇차례 시행착오를 대가로 치르고 수입자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 바이어들이 이전처럼 구매에 열을 올리지 않고 기존 계약의 재협상에 치중하는 바람에 미국영화시장(AFM)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돼버렸다.'

미국의 영화전문 주간지 버라이어티는 최근 지난 7일 폐막된 AFM 결산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했다.또다른 주간 소식지 할리우드 리포터도'90년대초부터 핵심 구매지역으로 떠오른 한국이 갑자기 조심스런 자세로 돌아섰다'고 지적했다.

이 두 전문지의 기사는 그동안 한국이 세계 영화시장에서 얼마나'큰손'을 과시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한국은 미국영화의 10대 해외 수출국에 들고 수출가는 독일에 이은 세계 2위 수준.

삼성영상사업단.대우시네마.SKC.현대등 대기업 영화구매팀들은 이번 AFM에서 새로운 작품 구매보다 그동안 불리하게 체결됐던 기존의 계약조건들을 재협상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 이유는 그동안 흥행대작의 배급권을 놓고 국내 기업들끼리 출혈경쟁을 벌여 불리한 계약을 체결해온 게 첫손에 꼽힌다.과당경쟁은 개별 작품들의 가격을 터무니 없이 올려놓은 것은 물론 영화 제작비의 일정비율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해당

영화사의 모든 작품을 독점배급하는 권리를 따는 아웃풋거래에서도 대기업들은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체결했었다.제작비 분담비율이 6~8%로 높아 대작의 경우 4백만달러(약35억원)가 보통이었던 것.또 영화를 수출한 영화사가 미국 세관에 물어야 할 원천세(로열티의 11%선)까지 국내 기업이 떠맡아 왔다.

이번 AFM에서 대기업들은 이런 원천세 징수의 부당함,한국시장 규모로 볼 때 지금까지의 수입가가 너무 비싸 적자가 쌓이고 있는 현실을 이해시키는데 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AFM에 참가하고 돌아온 대기업 관계자는“3백만~4백만달러나

하는 영화를 들여와 국내에서 흑자를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구체적인 흥행실적을 들고 가 이런 점을 이해시키려 했고,이미 구매계약을 체결한 작품들도 가격을 깎으려는 재협상을 했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작을 들여 오기 위해 비디오용 B급영화들을 같이 사야 하는'끼워 팔기'계약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버라이어티지는'한국은 그동안 너무 비싸게 영화를 사왔고 이제는 덜 사고,덜 지불하며 작품 선택에 더 조심스러워졌다'고 시장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이번 AFM의 구매 자제 분위기는 사실상 세계경제의 전반적인 불황과도 연관이 깊다.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도 구매에 조심스런 태도를 보여 지금까지의'판매자 주도 시장'에서'구매자 주도 시장'으로 바뀌는 분위기였

다는 것.또 참가했던 관계자들의 말처럼“별로 좋은 영화가 없었던 것”과 달러환율 급등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AFM(3월)과 칸영화시장(5월).밀라노영화시장(MIFED)은 대기업들이 영화를 사오는 3대 국제시장.이번 AFM은 칸영화시장의 전초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어 대기업들의 자제 분위기가 5월 칸영화제까지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

영화 관계자들은 대기업을 비롯한 한국의 바이어들이 칸영화제에 가서도 서로 싸우는 추태를 보이지 않고 부당한 계약조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연한 자세를 보인다면 수입가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남 기자〉

<사진설명>

대기업이 수입한'에비타','컷스로트 아일랜드','슬리퍼스'.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외화를 수입해 국내 흥행에서 계속 적자의 쓴맛을 본 대기업들이

수입 자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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