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탄신600주년심층점검>6. 한글전용 이대로 좋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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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 세상의 수많은 말 가운데 우리겨레처럼 제 말을 마음대로 기록할 수 있는 한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한글은 세종대왕께서 우리말의 음운조직을 세밀히 분석해 과학적으로 창제한 소리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어느

정도 정직하게 기록하는데에는 손색이 없다.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은 신문.잡지와 문예작품은 물론 학위논문까지도 순한글로 쓰는 추세에 있다.심지어 표의문자만이 가능한 것으로 알았던 약어까지도'비냉(비빔냉면)''나사본(나라사랑운동실천본부)

'처럼 표음문자인 한글로 만들어 쓰는 예도 생겼다.

그러나 한글은 우리말을 기록하는 하나의 표기수단일 뿐 우리말 자체는 아니다.그런데도 한글이 곧 우리말인 줄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문제는 우리말의 어휘체계에 있다.8.15광복 이후 우리겨레가 꾸준히 펼쳐온 우리 고유어 사랑운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전체어휘의 절반 가량은 아직도 한자로 이뤄진 어휘가 자리잡고 있다.이런 한자어가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꽃'보다'화훼'를,'죽었다''돌아가셨다'보다 '서거'를,'기름값'보다'유가'를 즐겨쓰고 있다.그래

서 흔히 한글로 쓰기만 하면 누구나 다 알기 쉬운 글이 되는 줄로 여기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가령 신문기사에서 가신.패권.만연.가시적.격앙.척결.향배.감안.유언.제소.부익부빈익빈.보수회귀.폐쇄회로.제어계측과등을 한글로 기록했

다고 해서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글이란 읽어주기를 바라고 쓰는 것이다.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면 차라리 적절히 한자를 아울러 쓰는 것이 좋다.한글로 쓰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고 겨우 몇백 단어를 가지고 뜻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무리다.

실제로 컴맹.컴퓨터.인터넷.모빌오피스.인트라넷등 새로운 표현대상을 우리들은 우리말로 표현할 수 없어 외래어를 받아들이고 있다.그전에도 수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개념을 우리는'버스''토큰'처럼 외래어로 받아들이기도 하고,경제.철학.명

사.철도등과 같이 한자어로 의역(意譯)해 받아들이기도 했다.따라서 우리가 한글만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면 우리 고유어를 될 수 있는대로 많이 쓰도록 힘쓰는 동시에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한자어를 이해하기 위해 한자공부도 소홀

히 하지 않으면서 중지를 모아 새로운 학술어까지도 우리말로 조어를 하는 노력이 앞서야 될 것이다.

그러기에 아직까지 나는 대중을 위한 글을 쓸 때에는 순 한글로 쓰고 학술논문은 개념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한자어를 많이 쓰고 있다.

강신항〈성균관대 명예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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