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벌>13. 반다라나이케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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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스리랑카의 현대 정치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있다.바로 2대에 걸쳐 총리.대통령을 배출한 반다라나이케 가문이다.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52)대통령의 부친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56년부터 암살되기 전인 59년까지 총리를 지냈다.모친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80)도 남편의 뒤를 이어 60년 총리에 취임한 인물이다.세계 최초의 여성총리였

다.시리마보 총리는 60년부터 65년까지 총리를 지낸 후 70년 다시 총리직에 올라 77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런 부모의 화려한 후광 아래 찬드리카는 94년 대통령에 올랐고 시리마보는 딸에 의해 다시 총리로 지명돼 모녀가 대통령-총리를 동시에 맡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를 만들고 있다.어찌됐든 48년 영국에서 독립한 스리랑카의 50년 현

대 정치사에서 반다라나이케 집안이 20년간 정권을 잡은 셈이다.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의 결합은 스리랑카 귀족 가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솔로몬은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고전을 전공한 지식인이다.시리마보는 칸디얀 지방의 귀족 출신이다.

솔로몬은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정치가였다.그는 처음에 통일국민당(UNP)에서 정치 활동을 했고 이후 스리랑카 자유당(SLFP)을 창당했다.56년 총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3년만에 한 불교 승려에 의해 암

살됐다.

이후 스리랑카 자유당은 부인인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를 당 총재로 내세웠고 곧바로 남편의 뒤를 이어 총리직을 거머쥔 이후 지금까지 정치 일선에서 뛰고 있다.

솔로몬의 사회주의 이념을 이어받아 시리마보는 재임 기간중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등 당시로선 매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펴나갔다.시리마보가 한때 야당 세력에 의해 직권남용 혐의로 몰려 정권에서 물러났던 것은 그녀가 너무 과격하다는 평가

를 받을 정도의 정책을 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기 때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시리마보는 지난 77년 총리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스리랑카 자유당을

이끌어 나가면서 자식들을 정치가로 키워 나갔다.그녀는 70년대말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에 있던 둘째딸 찬드리카를 스리랑카로

불러들여 정치에 참여하도록

했다.찬드리카의 정치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녀는 78년 전직 영화배우 출신의 정치가 비자야 쿠마라퉁가와

결혼,부부가 함께 정치활동을 해나갔다.찬드리카는 86년 스리랑카 자유당

총재에 오른다.공식적으로 부모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의 정치활동은 쉽지 않았고 88년에는 남편 비자야

쿠마라퉁가가 정적(政敵)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극마저 벌어졌다.남편

피살직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찬드리카는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90년

귀국했다.

그녀는 정치 때문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지만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94년 8월 5개 야당연합을 이끌고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 3개월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62%가

넘는 득표율로 대통령에 올랐다.

대통령에 오른 그녀는 총리직을 어머니인 시리마보에게 넘겨 현재

반다라나이케 집안은 스리랑카 권력의 정점에 서 있다.

시리마보는 아들인 아누라 반다라나이케도 정치가로 키웠다.시리마보는

78년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을 개정한 뒤 처음 치른 8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누라를 대통령 후보로 밀었으나 당내 의견 차이로 다른 인물이 후보로

출마했었다.아누라는

이후 스리랑카자유당에서 나와 현재 야당인 통일국민당 소속 의원으로

활동,다른 길을 걷고 있다.

정권은 잡았지만 찬드리카 대통령의 앞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무엇보다

독립을 요구하면서 83년 이후 유혈테러를 계속하고 있는 타밀 반군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 3일만 해도 찬드리카 대통령이 머물던 별장 인근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다행히 화는 면했으나 이는 그녀가 앞으로 헤쳐나가야할

정치적 시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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