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37>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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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호 16면

국내 투어에서 가장 저평가된 선수는 KLPGA투어의 안선주(21)가 아닐까 싶다. 실력에 비해 제대로 평가를 못 받고 있다는 뜻이다. 270야드를 넘나드는 장타에 샷도 정교한 편이다. 그런데도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다른 선수들의 몫이다. 육중한 체격 때문에 불이익을 받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싶다.

지옥의 라운드, 퀄리파잉 스쿨

2008년 안선주에겐 불운이 잇따랐다. 지난해 3승을 올렸지만 올해는 1승에 그쳤고, 준우승에 그친 게 다섯 차례다. 더구나 지난주 끝난 LPGA투어 퀄리파잉 스쿨 최종 예선에선 갑작스러운 발목 통증 때문에 2라운드를 마친 뒤 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2차 예선에서 1위를 차지했던 그였기에 아쉬움은 더 컸다.

퀄리파잉 스쿨은 PGA와 LPGA투어로 가는 ‘등용문’이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골프 유망주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대결하는 무대다. 각각 4라운드로 열리는 1, 2차 예선을 통과하면 장장 6라운드의 최종 예선이 기다리고 있다. LPGA투어의 경우엔 최종 예선이 5라운드다.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큰 강행군인 데다 다른 선수들과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옥의 레이스’로 불린다.

2006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 골프 스쿨(PGCC)에서 연수 중이던 필자는 퀄리파잉 스쿨을 직접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캘리포니아주의 SCGA골프장에선 PGA투어의 퀄리파잉 스쿨 1차 예선이 열렸다. 120여 명의 지원자 가운데 청각 장애 골퍼로 알려진 한국의 이승만(28)도 있었다. 평소 이승만의 실력으로 미뤄 보건대 그가 120명 가운데 30명을 뽑는 1차 예선을 통과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첫날 선두권에 나섰던 그는 2라운드에서 삐끗하더니 최종 4라운드에선 커트 라인에서 간당간당한 위기로 몰렸다. 실력은 출중한데 과도한 중압감이 문제였다. 모든 선수가 마치 검투사라도 된 양 한 샷 한 샷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승만은 결국 1타 차로 고배를 들었다. 그날 경기 도중 함께 라운드하던 동료 선수는 이승만의 캐디가 골프화를 신고 나온 것을 문제삼았다. 캐디는 골프화를 신어선 안 되고 반드시 운동화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승만도, 필자도 그날 처음 알았다. 골프 규칙을 제대로 몰라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캐디가 운동화로 갈아 신는 것까지 신경 쓰다가 1타 차로 떨어진 뒤 망연자실해하던 이승만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올해도 퀄리파잉 스쿨은 열렸고, 선수들 사이엔 희비가 엇갈렸다. LPGA투어 퀄리파잉 스쿨에선 미셸 위와 양희영 등이 합격한 반면 안선주는 합격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

“퀄리파잉 스쿨을 앞두고 하루에 여덟 시간씩 무리한 훈련을 한 탓에 정작 본대회에선 발목 통증이 심해져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어요. 함께 미국에 갔던 아빠는 ‘내 눈치 보지 말고 정 힘들면 대회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눈물을 머금고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안선주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승만은 2006년 퀄리파잉 스쿨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이듬해 아시안 투어에서 우승했다. 그러고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늘도 샷을 가다듬고 있다. 이승만이 그랬듯 안선주도 다시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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