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손가락질 받던 노조가 상생의 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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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 시민들이 지하철을 운영하는 대구도시철도공사(사장 배상민)를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사고철’ 아니면 ‘파업철’.

2003년 2월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 터졌다. 시민 191명이 숨지고 146명이 부상을 당하는 끔찍한 참사였다. 하지만 사고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구지하철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그 이후 3년 연속으로 파업을 했다. 2005년엔 공기업 전면 파업 최장 기록인 88일간 파업을 했다. 노조는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민주노총 산하 사업장 가운데서도 가장 강성 노조가 됐다.

시민들의 원성이 쏟아졌지만 노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다는 대구시 달서구 주민 김원양(38)씨는 “적자 투성이인 데다 걸핏하면 사고가 나는 대구지하철이 해마다 투쟁을 하니 시민들 입장에선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최종윤 노조위원장은 “당시 지하철 직원 복장을 입고 거리에 나가면 시민들이 지나가면서 손가락질을 했었다”고 회상했다. 파업이 계속되던 2005년 10월 6일엔 손동식 사장이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 사장의 유족들은 “노조 때문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며 노조원들의 조문도 받지 않았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右)이 10일 대구철도공사 월배차량기지에서 열린 2008 노사문화대상 시상식에서 배상민 대구도시철도공사 사장에게 대상인 대통령상을 주고 있다. 배 사장 옆은 3년 연속 무분규를 이끌어 낸 최종윤 노조위원장.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3년 연속 파업, 공기업 최장기 파업의 골은 깊었다. 초강성 노조라는 명성(?)은 현실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노조원들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 때문에 임금을 한 푼도 못 받았다. 대구지하철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98년 206억원이던 적자는 2006년 608억원이 됐다. 아무리 공기업이라지만 회생 불능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변화는 노조위원장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됐다. 파업에 지친 노조원은 2006년 온건파인 최종윤씨를 새 위원장으로 뽑았다. 근소한 표차였다. 그는 “대구 시민이 외면하면 대구지하철 노조도 없다”고 강조했다.

우선 노사 간의 대화 채널이 복원됐다. 일부 노조원이 퇴진 투쟁을 했지만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그해 10월 노사가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3년 만이었다. 12월 5일엔 임·단협을 타결했다. 그때부터 올해까지 대구지하철 노조는 3년 연속 무분규다.

대구도시철도공사 임원과 노조 간부들이 지하철 운행이 끝난 새벽에 직원들의 고충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 체험에 나서고 있다. [대구도시철도공사 제공]


회사도 변신했다. 이사회를 개최하기 전에는 반드시 직원 의견을 수렴했다. 수시로 경영설명회를 열어 회사 사정을 공개했다. 지난해는 합리적 사유 없이 비정규직의 계약을 해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규직처럼 고용을 보장해 준 것이다.

나빠진 이미지를 회복하는 건 노사 모두의 몫이었다. 노사가 함께 1주일에 한 번씩 농촌과 복지관 등을 찾아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시민들은 “대구지하철 이젠 진짜 달라졌다”며 격려했다.

배상민 사장은 “과거 노사 갈등으로 나락으로 떨어졌던 회사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이 묵묵히 지켜봐 준 덕택”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사모범기관으로, 봉사기관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10일 ‘2008 노사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시상하기 위해 대구도시철도공사 차량기지를 찾아갔다. 이 장관은 “대구도시철도가 이렇게 달라진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노조가 앞장서 지역경제를 살리려는 노력을 하는 걸 보면서 노사가 이렇게만 협조한다면 금융위기도 빨리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최 위원장이 대답했다. “우리보다 더 강성 노조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바뀌는데 글쎄…, 다른 지하철 노조들이 파업할 명분이 있을까요.”  

대구=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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