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한보금융>上. 기로에 선 은행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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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보(韓寶)사태는 한국의 은행들을 철저히 망신시켰다.국제적으로도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들었다.

창구는 꽁꽁 얼어붙었고,은행원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다.“이렇게 망신당하고도 또 달라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금융산업은 정말 희망이 없다”는 자조론도 나온다. 과연 우리 금융은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가.물론 사회의 일반수준과 동떨어져 은

행 혼자 변할 수는 없다.시대와 정권이 그렇게 바뀌어도 은행돈을 쌈짓돈처럼,은행장을 가신(家臣)처럼 부리고 싶어 하는 권력의 속성은 여전하다.자율화를 누누이 강조해온 지금의 문민정권 역시 은행장 선임은 대통령의 결재사항이었다.

이처럼 권력이 은행장을 좌지우지했음도 사실이지만 은행원들도 임원으로 승진하고 행장자리에 앉기 위해 스스로 사방을 찾아다니며 온갖 추태를 부려온 것 역시 사실이다.

한 은행간부는“이번에 수갑을 찬 대부분의 은행장들이 과연 어떻게 그자리에 올랐는지를 잘 따져보라”고 말한다.외압으로부터 은행을 보호하기는 커녕 외압을 스스로 끌어들였던 경우도 적지않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외압에 목을 걸고 끝까지 버텼던 일부 은행들은 한국 금융계의 그나마'희망'이다.이들은 은행장 선임과정서부터 외압을 배제하고 규정대로 해온,제대로 된 은행들이다.

내부 경영면에서도 은행들의 변명은 설득력이 없다.한 시중은행장은 한보의 담보 부족을 따지는 언론의 지적에“그럼 은행보고 전당포하라는 얘기냐”고 받아쳤다.

外壓 스스로 끌어들인 은행 자체에도 큰 책임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막상 한보가 부도가 나자 은행들은 담보문제로 허겁지겁이었다.멋대로 담보가격을 매겨 어떻게든 한보에 퍼준 여신 총액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정신이 없었다.한보에 물린 5개 은행이 담보 총액중 37%만 감정원의 공식

평가를 받았을뿐 나머지는'자체평가'였다는 것이 은행감독원 특별검사에서 드러났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거듭돼 왔을까.일반기업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은행들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여전히'민간 상업은행'이 아니라는 점이 한보사태로 거듭 확인된 셈이다.국책은행과 전당포의 두 얼굴을 가진 얼치기 상태에서 계속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결국 정부가 뒤를 받쳐

줄 것이라는 의식 때문에 한보에 물려들어갔다”(존 버튼 파이낸셜 타임스 서울특파원)는 지적은 우리 시중은행들의 실상을 꿰뚫고 있다.

시중銀도 하나의 기업 손해보는 장사 피해야

해답은 원론으로 돌아가 찾는 수밖에 없다.시중은행의 본질은 돈장사를 하는 기업이다.전당포와 다른 점은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받은 예금을 좋은 기업,유망한 사업을 꼼꼼히 가려 대줘야 하며,또 이익을 내야 한다.아무리 담보가 많아도 신용이 나쁜 기업이나 전망이 좋지않은 사업은 피해가야 한다.그렇지 못하면 은행은 다른 기업처럼 부도가 나야 한다.

제일은행의 지난해말 현재 총여신은 28조원.이 가운데 6개월이상 이자를 못받고 있는 불건전여신은 1조5천억원(6.7%)에 달한다.한보에 물린 1조원을 보태면 거의 10%에 육박하는 숫자다.'장사밑천'격인 자기자본(1조8천5백억원)

보다 훨씬 많은 돈이 반쯤 떼인 상태다.일반기업 같으면 벌써 망했을 것이다.

제일은행 뿐만이 아니다.25개 시중.지방은행들의 총여신 가운데 6개월이상 이자를 못받는 돈의 비율은 4.3%에 달한다.대표선수격인 조흥.상업등 6대 시중은행은 이같은 불건전 여신비율이 5.2%,금액으로는 8조3천억원에 달한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선 결국 은행에 책임경영체제를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다.은행에 진짜 주인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얘기다.한보에 한푼도 물리지 않은 하나.보람은행이나,20억원을 빌려주는데 그친 신한은행 같은 은행이 좋은 사례다.

주인이 분명한 이 은행들은 정확한 신용분석.타당성 검토등을 통해 한보와의 거래를 잘랐다.물론 방법이 문제다.은행에 주인을 만들려면 대기업들의 참여가 불가피하다는 인식 때문이다.그러나 사금고(私金庫)화를 막는 장치를 갖추고 대기업의

은행경영 참여를 허용하자(魚允大 고려대 교수)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주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과도적으로 일단 은행장이 뽑히고나면'과거'는 문제삼지 말고 경영권을 보장해주는'단절(斷切)방식'을 도입(李經植 한은총재)하자는 견해도 설득력을 지닌다.

은행들의 부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실채권 전담은행을 설립하자는 대안(金仁埈.鄭雲燦 서울대교수)도 제시되고 있다.은행간의 과감한 합병을 통해 부실부담도 줄이면서 외국의 거대은행들과 경쟁할 채비를 갖춰야 한다는 방안도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방안이 등장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금융인 스스로의 의식 변화 여부다.이처럼 값비싼 코스트를 지불하고도 변하지 못한다면 한국 금융의 발전은 정말 요원하다는 우려가 지배적이다.그런 뜻에서 지금의 한국 금융 위기는 진정한 기회일 수 있다. 〈손병수 기자〉

<사진설명>

지난 1월23일 한보철강 부도 수습방안을 발표하기 위해 모인

채권은행장들.그러나 이 가운데 두명은 바로 이 한보사태로 구속됐고 다른

두명도 은행감독원으로부터 문책 경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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