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국민의 氣 살리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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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신문을 넘기다 한 책광고에 시선이 딱 멎었다.책 제목은'통곡소리'였다.그리고 이런 광고 카피가 그 제목을 받쳐주고 있었다.'이 놈들아,이 죽일 놈들아!'

순간,정말로 누군가 통곡하며 소리치고 있는 듯한 착시(錯視)와 환청(幻聽)에 사로잡혔다.그리고 마침내 '국민의 울분이 이 정도에까지 이르렀구나'하는 비감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찬찬히 보니 책은 요즘의 정치 현안과 전혀 관계없는,중국 군대위안부에 관한 것이었다.그래서 책 제목이'통곡소리'였고'이 놈들아,이 죽일 놈들아!'는 일본군을 향한 울부짖음이었던 것인데 그만….

허탈감에 빠진 국민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이 비단 필자 한 사람뿐이었을까.근래 신문을 읽다보면 기가 차고 화가 나서'이 놈들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소리도 질러보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우리의 경제성장이 어떻게 이룬 경제 성장인가.문민시대는 또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맞게 된 시대인가.돌아보면 지나온 길목길목마다 문자 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이 고여 있지 않은가.그렇게 이룩한 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이 이 꼴이 되고 말다

니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도 큰 권한이 주어진다는데 있다.우리가 이런 민주주의의 약점을 미리 간파해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지난 25일의 담화에서 그 어느때보다 강

도높은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했다.아울러 부패방지와 경제회생,안보강화와 공정한 대선(大選) 관리에 관한 약속을 했다.그러나 반성은 너무 뒤늦었다.약속한 과제 하나하나가 구조조정과 제도개혁을 통해 이룩해야 할 거창한 것들이다.이런 것

들을 임기가 실제로 불과 10개월 남은 처지에서 이룩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담화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金대통령의 반성과 다짐도 국민이 기대했던 것만큼 확연하고 자신감에 차있지도 않다.“그러나 이유야 어떠하든…”“만일 제 자식이 이번 일에 책임질 일이 있다면…”“검찰의 중간 수사발표가 있었습니다만…”“필

요하다면 정치자금법과 선거법도 다시…”하는 식이다.하겠다는 것인지 안하겠다는 것인지도 불분명한 조건절(條件節)이 거듭되고 거듭되는 자신없는 담화였다.

바야흐로 金대통령은 담화에 이은 수순으로 대대적인 당정(黨政)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가장 손쉽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이기는 할 것이다.그러나 구조와 제도가

그대로 있는데 얼굴을 바꾼

다고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그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당정개편이

있었나.이제는 동원할 인물도 없거니와 그나마“내가 왜 난파선에

올라타야 하느냐”고 시큰둥한 반응들이라니 크게 기대할 것도 없을 것

같다.

또 지금 뒤늦게 누가 정부에 들어가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국민이나

사회가 그를 고분고분 따라갈 분위기도 이미 아니다.새로 자리를 맡으면

무언가 새 일을 벌이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기가 십상인데 그런 생각일랑은

애시당초 하지 말았으

면 한다.이제와서 새삼 무엇을 뜯어고치고 실험할 시간은 없는 만큼

국정관리에나 주력해야 한다.지금 국민이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것은

앞날에 대한 희망과 용기다.희망과 용기를 가지려면 기(氣)가 살아나야

한다.

좌절한 국민의 기를 되살려주려면 새 정부는'교도(敎導)정부'가

아닌,'소방(消防)정부'를 자임해야 한다.그저 국민이 목마르다면 급수차를

보내고, 불이 나면 소방차를 보내며,금지는 풀고,막힌 곳은 뚫는 서비스

행정이 이 무렵에는 절실히 요구된다.

서비스행정 펼쳐야

이와 함께 한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중앙권력의 약세를

틈탄 일선행정,지방행정의 방종과 횡포를 다스리는 것이다.이에 힘 쓰는

것은 국민들도 적극 환영할 것이다.

이런 일 외에는 모두 능력 밖의 과욕이 될 가능성이 크다.남은

기간만이라도 행정의 빗장을 과감히 풀고 국민에게 철저히 봉사해 국민이

왕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그래야 사회 분위기는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다시 뛸 수 있을 것이다. (유승삼 출판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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