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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가 자백 내용 뒤집어 증인대 서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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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달 28일 서울 남부지법에서 열린 통역사 간담회에 참석한 배준식씨. [조문규 기자]

올해 10월 초 서울의 한 경찰서.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를 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중국인 A씨가 수사관 앞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그의 바로 옆에 중년의 남성이 함께 앉았다. 수사관이 “누가 일을 시켰는가”라고 묻자, 이 남성은 재빠르게 중국어로 통역해 A씨에게 전달했다. 그는 경찰 중국어 통역사로 10년째 활동하고 있는 배준식(62)씨다.

배씨는 경찰서에서 ‘호랑이 통역사’로 불린다. 경찰관의 질문을 통역할 때 마치 자신이 신문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말투를 사용해서다. 그는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뒤 중국어 통역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만에서 대학을 나와 중국어에 능통한 데다 수사 경험이 있다는 장점을 살렸다.

배씨는 보이스 피싱 사건으로 경찰서에 통역을 하러 갈 때면 ‘쪽지’부터 찾는 걸로 유명하다. 쪽지는 보이스피싱 일당의 장부로 돈 거래 내역·은행 계좌 등이 적혀 있다. 배씨는 “보이스 피싱을 하다 잡힌 피의자의 대부분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 바꾸기를 잘해 쪽지를 본 뒤에 통역에 들어간다”라고 말했다. 최대한 수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생각해 낸 배씨만의 통역 노하우다.

배씨는 “수사기관이나 법정의 통역사는 일반 통역사와 일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수사기관·법정통역사는 말실수나 문법이 틀린 말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단다. 말을 매끄럽게 다듬어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피의자나 참고인이 무심결에 내뱉는 한 마디가 수사나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통역을 놓고 법정에서 신경전이 벌어질 때도 많다. 피의자 측에서 통역사를 바꿔달라고 요구하거나, 통역할 때마다 시비를 붙는 일도 적지 않다.

경찰에선 자백을 했던 피의자들이 법원에선 “통역이 잘못 전했다”라며 범죄사실을 부인해 난처할 때도 있었다. 배씨는 “범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 법정에 통역사가 아닌 증인으로 섰던 적도 있다”라며 씁쓸해 했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의 통역사가 되기 위해 별도의 시험을 치거나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해당 기관이 외국어 능통자를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서류심사를 거쳐 뽑아 쓴다. 통역료는 법원의 경우 기본 30분에 7만원. 그 뒤 30분마다 5만원이 추가된다. 경찰과 검찰은 각각 한 시간에 3만원·2만5000원이다.

배씨는 “외국인 범죄가 점점 늘어 통역사 수요가 늘고 있지만, 일이 불규칙하게 있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아 걱정이다”라며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활동하는 전문 통역사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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