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북경, 평양 그리고 서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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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가난한 것이 사회주의는 아니다.”덩샤오핑(鄧小平)의 유명한 경구다.마오쩌둥(毛澤東)의 수사력(修辭力)에는 못 미친다지만,소박하며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교조주의적 마오이즘이 대륙을 휘몰아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진 현실에 대해'가난한 것이 사회주의는 아니다'고 말했을 뿐'사회주의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말하지는 않았다.사회주의 혁명가로서의 신념 때문만은 아니다.그 말 뒤에

는 이데올로기의 지배라는'당대의 현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이데올로기만으론 이룰 수 없는'미래의 중국'을 건설하려는 지도자의 심려가 배어있다.그리고 78년 그가 다시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그는'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내세우며 개혁

과 개방을 무기로 그 꿈을 펼쳐나갔다.

그의 생각은 92년초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보다 극명하게 나타난다.“개혁.개방은 과감하게 해야만 한다.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즉시,과감하고 대담하게 실행해보아야 한다.해로운 것은 (이런 방법이)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식으로 묻는 것이다.판단의 기준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가,국가의 종합적 국력증강에 유리한가,인민의 생활수준향상에 유리한가 하는 것이다.”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외국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베이징(北京)지도층 내부에 향

후 진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때 나온 鄧의 한마디는 내부갈등을 잠재우고,대외적 신인도를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그 결과는 92년 이후 연 10%를 넘는 경제성장,1천억달러를 웃도는 외국인투자,방대한 무역수지흑자와 이에 힘입은

세계 2위의 외환보유고로 나타났다.

이데올로기를 생각하되 함몰되지 않는,불안과 혼돈의 시기에 국가의 침로(針路)를 제시하는'지도자'의 진면목이란 대저 이런 것이다.鄧이 이룬 국부증진과 민족적 자긍심의 회복은 그가 남긴 부(負)의 유산을 덮고도 남는 것이며,향후 벌어

질지도 모르는 권력투쟁에서 역사를 뒤로 돌리는 우(愚)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파제가 될 것으로 나는 본다.

북한 지도자인들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도 민생향상이 중요함을 몰랐을리 없다.鄧이 중국의 최고권력자로 등장한 78년 시작된 북한의 제2차 7개년계획은 인민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와 함께 주민생활의 향상과 대외무역의 증대를 주요 목표

로 내걸었다.그 후로도 합영법(合營法)제정과 나진.선봉 경제특구창설 등 현실타개를 위한 노력이 없지 않았다.그러나 북한 지도층은 그러한 노력들이 몰고 올지 모를 그들 자신의 파멸-나라와 인민의 파멸이 아니다!-에 대한 공포를 이데올로기의'순결성'이란 시대착오적 구호로 위장,사실상 거부했다.

“인민들,노동자.농민들,지식인들이 굶어죽는 사회가 어떻게 사회주의 사회가 될 수 있겠는가.” 한국 망명을 위해 베이징에 체류중인 황장엽(黃長燁)북한 노동당비서가 한국에 전했다는 서한의 한 구절이다.이러한 말이 북한 제일의 이데올로그

라는 黃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북한의 비극이자 아이러니다.

이데올로그가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느끼는 상황에서,지도자는'주체'와'붉은 기'로 이어지는 이데올로기에 더욱 집착하면서 북한 경제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90년 이래 계속 뒷걸음질치는 경제성장과 대외거래,국내총생산의 50%를 웃도는 외

채(外債)비율,그리고 무엇보다도 극심한 식량난.'자력갱생'의 '민족경제'는 파산한지 오래다.사회주의'기치'아래에서도 자본주의 방식을 활용하는 심모(深謀)도,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이를 헤아리고 이용하는 원려(遠慮)도 평양에선 찾아 볼 수 없었다.

지도자의 중요성이 어찌 이들만의 일이겠는가.이 시간 서울에서도 국민들은 지도력의 부재(不在)를 탄식하며,지도자의 덕목을 재삼 생각하고 있다.총체적 난국으로 표현될만큼 정치.경제.사회 어느쪽 하나 온전치 않은 불안과 혼돈의 시기에 우리의'지도자'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박태욱 (국제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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