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春史의 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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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생김새나 신체적 조건으로만 따진다면 나운규(羅雲奎)는 배우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땅딸막한 키에 달라붙은 목,구부정한 어깨와 좌우로 벌어진 각선(脚線)등 어느모로 보나 기형(畸形)에 가까웠다.하지만 그는 생전에 만든 20편의 영화에서 원작.각색.감독.주연을 모두 혼자 도맡았다.그의 인기가 절정을 치닫고 있을 때 주변의 친구들이 농반진반으로 그가 영화에 출연하는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주연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전주(錢主.제작자)의 명령이니까 하는 수 없이 이 못생긴 모습을 팔아먹는 거지.” 하지만 그는 그런 숙명적인 외형 조건을 정신의 저력으로 극복했다.22세때인 1924년 윤백남(尹白南) 감독의'운영전(雲英傳)'에서 엑스트라인 교군 역할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내비쳤을 때만 해도 이 젊은이가 2년뒤'아리랑'이라는 불세출의 걸작을 만들어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그는 탁월한 감각으로 영화 속의 인간상을 구현해내는'천재'였던 것이다.

그의 감독 데뷔작인'아리랑'이 민족혼을 고양하면서 예술성과 흥행에서까지 큰 성공을 거뒀던 것도 그가 개발한 몽타주 등 독창적 기법과 주인공'영진'의 역할 때문이었다.영화가 시작되면 일제(日帝)와 한민족을 상징하는'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이 나오고 이어 변사(辯士)의 유장(悠長)한 해설이 펼쳐진다.“…평화를 노래하고 있던 백성들이 오랜 세월에 쌓이고 쌓인 슬픔의 시를 읊으려고 합니다….” 3.1운동때 검거돼 혹독한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영진'역의 나운규는 바로 일제 탄압으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모습이다.그 직후'아리랑'에 자극받아 심훈(沈熏) 감독의 영화'먼동이 틀 때',현제명(玄濟明)의 가곡 '희망의 나라',이상화(李相和)의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 항일 예술작품들이 잇따라 쏟아져 나온 것도'아리랑'의 존재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아리랑'엔 지금 돈암동 네거리서 정릉길 입구에 이르는 속칭 아리랑고개가 몇차례 배경으로 등장한다.성북구가 그곳에 그의 호를 딴 '춘사(春史)의 거리'를 조성키로 했다 한다.아직도 갈 길이 먼 우리 영화가 나운규를 되새기면서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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