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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풀스토리>下.독특한 성격 평양의 '미운오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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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황장엽이는 너무 까탈스러워.뭐이 그리 가리는게 많은지.” 김정일(金正日)은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있으면 종종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황장엽(黃長燁)노동당비서를 좋지않게 평가했다.비공식적인 자리에는 대개 황장엽이 제외됐기 때문에 黃은자연스레 권력층의 문제아로 낙인찍혔다.김일성 (金日成)은 생존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김정일에게 몇차례 주의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정말 독특한 성격의 인물이다.무엇보다 그는 학창시절인일제말부터 생식(生食)을 해왔다.생쌀을 물과 함께 씹어먹는 습관이었다.
그는 또 매우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주변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젊어서는 비상한 암산능력으로 사람들을 감탄시켰고,모스크바 유학때는 몇달만에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해 보였다.그러나 황장엽은 북한 권력체제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 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권력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공언하는 그였지만 자의든 타의든 70년대 권력핵심부에서 그는 떠오르는 별이었다.
김일성이.가장 믿고 빌릴 수 있는 머리'로 그를 지목한 점은 가장 든든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논리적이고 빈틈없는 성격탓으로 같은 당비서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받았다.대남담당 비서 김용순(金容淳)은 그를.3단논법'이란 별명으로 불렀다는 것이 한 고위 귀순자의 전언이다.논문이나 연설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그의 논리전개방식을 지나치게 계산적인 태도라고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80년10월 6차당대회에서 사상담당 비서로 선출된 그가 93년께 국제담당 비서가 된다.90년5월 6기 18차 전원회의에서국제담당 비서가 된 김용순을 밀쳐냈다.당시 그는 김*일성에게 자신이 국제문제를 한번 해보겠다고 진언했다는 것이 다.
김일성의 측근으로서 그는 다른 핵심고위층들의 몫을 가로채는 일이 많았다.별다른 욕심없는.존경받는 사상이론가'라는 표면적인이미지와는 다른 감춰진 모습이었다.
이번 그의 귀순과 관련해 많은 북한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점은 그에 대한 평가부분이다.망명신청 동기등에 대해 지나치게 미화하는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도 한때는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불가피하게 다른 세력을 숙청하고 밀어내기식의 낙점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점에 대한 평가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70년 당대회에서 제기한.붉은 대가정'이란 개념과 72년12월 최고인민회의 토론에서 밝힌.정치적 생명체론'은 바로 김일성 개인의 통치기반을 확립하고 김정일로의 후계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 개발한 통치논리를 가장 먼저 김일성에게 바치고 효과가 떨어질 때쯤 다시 전환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동안 그를 북한 권력내의 문제아나 김정일에게 한마디도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자로 증언하던 귀순자들이 망명신청 이후 하루아침에.자상한 스승'이나.고뇌하는 노철학자'로 입을 맞추는데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 는 점도 문제다. 그의 인생역정을 탈북 망명이라는 감상적인 잣대로 잴 것이아니라 좀더 차분히 시간을 두고 평가해야 된다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다.그의 말대로 탈북 망명에 대한 평가는 역사와 후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영종 기 자〉 지난 94년 6월26일 방글라데시 민족사회당 대표단의 김일성 예방에 배석한 황장엽 국제담당비서(사진 맨왼쪽).김일성(94년 7월8일 사망)과 마지막 찍은 사진으로 맨 오른쪽은 김양건 노동당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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