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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이 던진 메시지 '평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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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혼자가 아니다. 수백만 미국인과 함께한다. 이라크에서 죽은 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외친 마이클 무어 감독. 미국에서는 제작단계부터 어려움이 많았지만 칸에서는 줄곧 환호를 받았다. [AP]

▶ 미국 해군들이 길 가던 청년들에게 입대를 권유하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화씨 911'의 한 장면.

23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제57회 칸영화제는 미국 감독 마이클 무어가 만든 다큐멘터리 '화씨 911'에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안김으로써 프랑스를 비롯한 전세계의 반(反)부시 정서를 가장 극적으로 대변했다. '화씨 911'은 영화제 기간 경쟁작 중 가장 뜨거운 관객 반응을 받았다. 시사회 때는 마이클 무어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환호를 보낼 정도였다. 칸영화제 사상 다큐멘터리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는 1956년 자크 쿠스토 감독의 '침묵하는 세계(The Silent World)' 이후 48년 만이다.

2002년엔 미국 고등학교의 총기 살인사건을 다룬 '볼링 포 컬럼바인'으로 칸에서 특별상, 아카데미에서는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무어는 미국 대기업의 횡포를 그린 '로저와 나' 등으로 미국에서는 '문제적인' 감독으로 통하고 있다. '화씨 911'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제작 단계에서부터 논란을 빚었다.

부시 대통령 집안과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 일가가 유착 관계에 있다는 사실 등을 '폭로' 함으로써 백악관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지난 18일 시사회 후 가진 기자회견 때는 "멜 깁슨의 영화사가 이 영화를 제작하기로 계약서를 쓰고 제작비의 일부를 보내왔으면서도 뒤늦게 발을 뺐다. 명백히 백악관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초 영화 배급을 맡기로 했던 디즈니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이전에 이 영화가 개봉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태다.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임에도 여느 극영화를 능가하는 강렬한 눈물과 웃음을 선사한다. 2000년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이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는 대목에서 출발하는 영화는 백악관 참모들의 표정을 리듬감있게 편집해 조롱과 야유를 보낸다. 9.11 테러사건 직후 빈 라덴의 미국 내 일가 친척들이 FBI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출국한 것을 비롯해 부시와 빈 라덴 일가가 움직이는 국제 금융자본의 연관성을 본격적으로 고발한다. 후반부에는 전쟁에 회의적인 이라크 참전 미군 병사들의 발언, 분노한 이라크인들에게 미군의 시체가 훼손당하는 모습,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의 성희롱 장면을 보여줘 충격을 주는 한편 이라크전에서 아들을 잃은 미군 어머니를 통해 미국 이라크 개입의 부당성과 비극성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마이클 무어는 시상식장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수백만 미국인과 함께 한다. 이라크에서 죽은 사람들이 헛되게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고 말했다.

또 심사위원들을 향해 "많은 사람이 이 영화가 옷장에 처박히길 원했지만 당신들이 그것을 끄집어내 주었다"면서 "미국의 위대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은 '만약 사람들에게 진실을 보여준다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며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이어 "칸에 있느라 엊그제 딸의 대학졸업식에 참석을 못했다"면서 "내 딸과 미국과 이라크의 아이들, 전세계 모든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영광을 바친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 초반에는 10여분짜리 애니메이션 '플랫 라이프(flat life)'로 단편부문 심사위원상을 탄 21세의 벨기에 감독이 "'화씨 911'이 상을 탈지 안탈지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미국인들이 있다면 절대 부시를 찍지 말라"고 말해 미리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한편 '주목할 만한 시선'이나 '감독주간'에 초청된 영화 중 데뷔작에 주는 '황금카메라상'도 첨예한 국제적 갈등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돌아갔다. 이스라엘 여성감독 케렌 예다야가 팔레스타인 매춘여성의 삶을 그린'황금'이 수상한 것이다.

이처럼 올해의 칸은 사상 최악의 영화제로 혹평받았던 지난해와 달리 전기간 중 고른 화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2년 전 집행위원장에 취임, 올해부터 경쟁작 선정에 전권을 행사한 인물인 티에리 프레모의 입지도 그만큼 굳어질 것으로 보인다. 각종 영화제 소식지는 마르코 뮐러를 신임 위원장으로 초빙한 베니스영화제도 애니메이션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초청하는 등 칸처럼 변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칸(프랑스)=이후남 기자

[아시아 영화 '한발 앞으로']
日.태국 등 모두 3편 수상…장만위는 여우주연상 받아

올해 칸 영화제는 '아시아'와 '젊은 영화'에 방점을 찍으면서 확연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쟁부문 출품작 19편 중 6편을 차지한 아시아 영화는 '올드 보이' 외에 '아무도 모른다'(일본.남우주연상)'트로피칼 말라디'(태국.심사위원상) 등 세 편이나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물론 엄마가 집 나간 뒤 홀로 남은 네 남매의 얘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아무도 모른다'에 감독상이나 작품상이 아니라 남우주연상을 준 데 대해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미 일본으로 돌아간 14살 소년배우 대신 나가 상을 받았다.

반면 촬영지연으로 필름도착이 늦어져 영화제 막판에 상영일정을 변경하는 소동을 빚은 홍콩출신 왕자웨이 (王家衛)감독의 '2046'은 시사회의 뜨거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아무 상도 타지 못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경쟁에 진출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이노센스'역시 빈 손으로 돌아갔다.

홍콩출신 배우 장만위(張曼玉.사진)가 프랑스 영화'클린'에서 약물중독으로부터 벗어나 인생의 재기를 꿈꾸는 가수로 열연해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을 포함하면 이 날 시상대에는 네 차례나 동양인이 올라섰다.

이런 아시아의 영광 곁에 또다른 승자는 주최국인 프랑스 영화였다. 경쟁부문에 오른 세 편의 프랑스 영화가 모두 이례적으로 상을 받았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클린'은 장만위와 한때 연인이었던 올리비에 아사이야 감독의 작품이고, 시나리오 작가이자 여배우이기도 한 아네스 자우이의 두번째 장편영화 '나를 봐요'는 각본상을 받았다.

감독상의 토니 가리프는 알제리 태생으로 프랑스에 망명한 자신의 이력을 알제리를 찾아가는 젊은 집시 남녀의 여정에 투영한 프랑스 영화' 유랑'으로 상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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