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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 연기의 카리스마 '백윤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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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끗 희끗 흰머리가 보여도 사진 속의 백윤식은 여전히 젊다. 연륜이 쌓여도 젊어 보이는 이미지는 그를 영원한 남자 주인공으로 만든다. [강정현 기자]

▶ 뮤직 비디오 ‘담백하라’의 한 장면

제2의 전성기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1970~80년대 멜로 배우의 대명사였던 백윤식(57)은 어느덧 드라마 '서울의 달'의 미술 선생을 거쳐, 지구를 파괴하려는 안드로메다 왕자가 됐으며(영화 '지구를 지켜라'), 사기꾼의 대부 김선생으로 돌변하더니(영화 '범죄의 재구성'), 통기타를 퉁기는 에릭 클랩튼이 됐다(뮤직 비디오 '담백하라'). 이순을 바라보는 어떤 배우가 이런 스펙트럼을 소화할 수 있을까. 그의 진지한 구석에는 폭소를 자아내는 끼가 숨어 있고, 카리스마는 관객을 압도한다. 젊은 매니어 팬을 몰고 다니는 그의 매력은 어떤 것일까. 양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그를 만났다.

▶그는 '알 파치노'다="처음에는 영화'히트'에서 도둑으로 나온 로버트 드 니로에 컨셉트를 맞춰 '범죄의…'의 김선생 역을 그려 나갔다. 그런데 백선생이 너무 잘 생긴 거다. 눈이 쑥 들어가고 이마가 나와 조명도 잘 받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알 파치노'라고 부른다."('범죄의…'의 최동훈 감독)

알 파치노가 할리우드의 카리스마라면, 백윤식은 충무로의 카리스마다. '범죄의…'은 여러 명의 사기꾼이 등장해 수다를 떠는 장면이 주를 이루는데, 대부분 백윤식이 분한 김선생이 한마디 하면 그 장면은 종료된다. 저음의 목소리가 깔리기 시작하면 산만하던 수다는 자연스레 교통정리가 되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후배에게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지 않는 선배로도 유명하다. 후배 배우가 어떻게 대사를 치든, 언제든 그는 적시에 받을 준비가 돼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유연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와 작업했던 '서울의 달' 작가 김운경씨는 "백윤식씨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몰입이 뛰어난 배우"라고 전한다.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의 체육관 관장역을 맡아달라니까 웨이트 트레이닝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역시 멜로에서 액션까지 아우를 수 있는 힘은 이런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백씨는 "나의 말투나 성격 같은 사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져준 김작가에게 고맙고 덕분에 나도 배우로서 전환기를 맞았다"고 답할 뿐이다.

▶그는 '에릭 클랩튼'이다=그는 뮤직 비디오 한편을 찍었다. 그 나이에 웬 뮤직 비디오? 그런데 그 한편이 요즘 세간의 화제다. '얼굴 없는 가수' 미스터 김을 대신해 통기타를 들고, 립싱크로 노래 '담백하라'를 부르는 백윤식의 모습을 보고, "진짜 립싱크 맞나?"라는 문의가 기획사에 빗발친다고 한다. 심지어 한 라디오 PD는 "백윤식씨 음반 내셨죠?"라며 출연 섭외까지 했다.

미스터 김의 기획사 팝 엔터테인먼트 강태규 이사는 "백윤식씨는 무표정한 연기가 압권이다. 웃기지 않으려 해도 웃음을 자아내는 캐릭터는 흔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진지하게 가면 그림이 제대로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처음부터 에릭 클랩튼이나 일본의 구와타 밴드를 연상하고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뮤직 비디오에서 보이는 '백윤식 밴드'다"라고 설명한다.

불독 맨션 이한철 등 최고의 세션맨들을 배경 삼아 가죽 재킷을 입은 백윤식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노래를 부른다. 기획사는 보름 전 음반을 백씨에게 전하고 "노래 연습하시라"고 했지만 내심 걱정이 많았단다. 그러나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걱정을 접었다. 기타 반주 코드까지 익혀 기타 치는 시늉을 완벽히 해내고 리듬감을 살려 입을 잘 맞추더라는 것.

▶그는 '히어로'다=그는 아버지 역할을 좀처럼 맡지 않았다. 과거에는 화가 이중섭, 시인 이상화 같은 고뇌하는 지식인, 'TV 문학관'의 주인공을 주로 맡았다. 영화에서도 20~30대 배우들과 한데 어울리는 주연이다. '범죄의…'에 같이 출연한 임하룡이 "캐릭터가 젊게 구축돼 부럽다"고 할 만하다. 그는 "사실 10년 정도 있으면 일흔이다. 그 생각하면 인터뷰할 맛도 안 난다"며 "그래도 젊은 감독이랑 어울리면 나이 생각을 잊는다"고 한다.

그의 꿈은 할리우드처럼 연륜 있는 연기자가 젊은 연기자와 대각을 이루며 주연을 맡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 숫자가 많아지는 요즘 "상황적으로 볼 때 기분 좋다"고 밝게 웃는다. 영화 현장에서 만난 감독.스태프들이 열심히 뛰는 모습에 "예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장의 목소리는 어떨까. "백선생은 우리의 영원한 주인공이다. 앞으로도 아버지 역은 안 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계속 '쎈'역, 새로운 역만 해주시길."그들의 이구동성이다.

홍수현 기자<shinna@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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